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8주차 (중간고사): 그때 삽질하지 않았다면 첫사랑은 끝까지 잘 됐을까?

1andau 2012. 5. 27. 03:00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중간고사 문제: 종강날 밤의 그 오해가 없었다면 승민과 서연은 끝까지 잘 됐을까?

 

단답형 모범답안: 아니요.

 

서술형 모범답안: 이하 주저리 주저리

 

하나하나 에피소드를 뜯어놓고 보면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 이야기는 정말 별것도 아닌데

많은 관객들에게 그 어떤 멜로 영화를 봤을 때보다도 더 슬프고 먹먹한 느낌을 준다.

이거보다 100배는 더 슬픈 첫사랑 이야기가 사방에 널려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 가운데 한가지는 이거다.

15년 뒤의 현실이 좃같기 때문(이거 영화 대사인거 다들 아시죠?)이다.

특히 이혼녀가 되어버린 서연은 더더욱.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깨어지지만 않았다면

서연과 승민의 현재가 지금보다는 행복했을거라고 영화는 강하게 암시를 걸고 있다.

건축학개론의 과거 첫사랑이 그토록 반짝이며 빛나는 이유는

현재 승민과 서연의 현실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정말로 종강날 밤의 그 오해가 없었고 승민이 무난하게 서연에게 고백했다면

영화의 암시처럼 두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마치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나 이휘재의 '인생극장' 같은 질문인데

내 생각에 승민과 서연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설령 두 사람이 행복하게 첫사랑을 시작했더라도

결국 15년 후에 서연은 의사와 이혼했을 거고 승민은 그 약혼녀와 결혼했을 것 같다.

 

승민과 서연이 과연 잘 됐을까라는 주제에 대한 여러 의견들 가운데 제일 현실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동갑내기들 첫사랑의 가장 큰 장벽인 군대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승민과 서연 사이의 신뢰가 저렇게 허약한데

승민이 군대라도 가버리면 둘은 보나마나 헤어졌을 거라는 예상이다.

 

 

서연이 두고 군대 갔어요. (이제훈이 출연한 영화 '고지전' 스틸 사진)

 

여기에 대한 반론들 가운데 가장 웃겼던 것은

승민은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 아버지가 돌아가신 외아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병역제도에 의하면 6개월 방위/공익이라서

그 정도는 서연이 충분히 기다려 주었을 것이라는 반론이었다.

정말 기막히게 현실적인 분석이다. ^_^;;;

 

 

꼭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한 번 싹튼 사랑을 온전히 잘 지켜서

행복한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경험이 모자라는 첫사랑은 더 깨지기 쉽고,

남자 여자 양쪽 모두 첫사랑이면 그때는 결혼까지 갈 가능성이 1/1000 정도나 될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듯,

인터넷에 이 질문에 답해 놓은 글들도 부정적인 예상이 거의 다 였다.

다들 뻔히 아는대로 첫사랑은 경험이 없고 서투르기 때문에 일찍 깨진다는 거였다.

 

 

 

 

"이제 우리 나이 갓 스물이야. 삶은 현란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아직은 텅 빈 그릇 같아.

거기에 무엇이 담기기 위해서는 ...(중략)... 세월이 십년 가까이 남아 있다구.

너, 첫사랑이 왜 언제나 슬픈 이별로 끝나는지 알아?

바로 그런 세월 때문이야.

너무 일찍 사랑을 시작한 벌이지." 

  

건축학개론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90년 무렵 그 시절에 최고의 첫사랑 이야기였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여주인공 서윤주가 남주인공 임형빈에게 하는 말이다.

첫사랑은 보통 일찍 시작하기 때문에 그만큼 오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그게 어디 그리 쉬운가? 사랑의 유효기간은 기껏해야 3년이라는 과학이론도 있지 않은가.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첫사랑의 기억은 수십년의 세월을 이겨내도 첫사랑 그 자체는 10년은 커녕 1년도 못 견디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악역 전문 대마왕 정보석 옹에게도 이제훈처럼 첫사랑 대학생 역할을 하던 청춘스타 시절이 있었다능..... 

 

"그때 우리에게 삶은 다만 몽롱한 가능성이었고 사랑은 혼란과도 비슷한 하나의 추상이었음에.

그리하여 우리가 불같은 열정으로 몰두한 것도 실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이름을 가진,

가끔 심각하긴 해도 대개는 요란하고 실속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음에."

 

역시 1990년 무렵에 인기있던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소설/영화에 나오는 말이다.

첫사랑의 주인공들은 대개 서투르다 보니

속도 조절을 잘못해서 초반에 열정을 너무 불사르다가 일찍 소진되어 버리기도 하고

경험 없이 보고 들은 것만 있어서 거기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다가 싸우고 쉽게 헤어지기도 한다.

이런 난관들을 요령있게 잘 헤쳐나가야 오랜 사랑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경지에 이르려면 그건 이미 첫사랑이 아니라 선수급 역량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 성장하는 동안 가장 잔인한 것은

여학생은 남학생보다 성숙하며 그 성숙함에 견뎌낼 남학생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대만 영화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那些年,我們一起追的女孩)에 나오는 대사인데

특히 동갑내기끼리 첫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학 1~2학년까지는 대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성숙하고 어른스럽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을 유치하게 여기고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남자들은 여자들을 어렵게 느끼고 부담스러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다가 곧잘 깨지는 것이다.  

 

건축학개론에 대한 감상문들을 찾아 읽다 보면

속설과 다르게 자신은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축복받은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 가운데 첫사랑과 결혼하기는 했는데 처음부터 주욱 계속 연애한 것이 아니고,

6년전에 처음 만나서 좋아했다가 서로 맞지 않아 헤어지고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나서 결혼했다는 사연이 있었다.

이 글이 재미있는 점은 여자 쪽이 말하기를

6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남편은 성격이 (좋은 쪽으로) 많이 변해 있어서 순탄하게 결혼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아직도 6년 전의 그 첫사랑과 지금의 남편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6년 동안 남자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헤피엔딩을 이룰 수 있었던 거다.

슬프게도 남자가 그만큼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첫사랑의 소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도 다른 이들처럼

서연과 승민이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첫사랑 말아먹고 헤어졌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승민과 서연의 인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떠오르는 '그 때 둘이 잘 됐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연상작용은

그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역시나 그들의 첫사랑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의 결말이 꼭 결혼이어야 행복한 걸까?

대학시절에 '왜 꼭 사랑의 결말은 결혼 아니면 이별이어야 하죠?'라는 선문답이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비록 결혼으로 끝맺지 못해도 활짝 꽃피는 첫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가치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나는 무려 4년 동안이나 한 여자와 사귀었던 경험이 있는데

오랜 세월 연애하다 보니 끝무렵에는 둘 다 모두 사랑이 다해버려서 저절로 끝이 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랑의 기억 자체는 행복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일찌감치 말아먹어 버린 첫사랑과 달리 아쉽거나 가슴 아프거나 애절한 느낌이 별로 없다.  

 

 

 

 

위의 사진은 건축학개론의 여러 스틸 사진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둘이 손잡고 서 있는 승민과 서연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마음에 든다.

이런 예쁜 모습은 단연코 스무살 첫사랑 때가 아니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첫사랑 그녀와 이런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이제훈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못 생겼고 나의 첫사랑도 수지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사진이 기막히게 잘 나오기는 했었지...)

사진을 10년 넘게 간직했었는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T_T

 

결혼으로 끝내지 못하면 함께하는 시간들은 무의미한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사랑과 함께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만큼 더 행복하고 가치있었을 거다.

서연과 승민이 오랜 시간 함께 하고서 사랑이 다해 헤어졌다면

그렇게 15년 후까지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지는 않았으리라.

마찬가지로, 첫사랑과 더 오래 사귀었어도 결국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겠지만,

내가 바보 짓거리 하면서 스스로 첫사랑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25년이 지난 지금 건축학개론을 보고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면서

벽에다가 머리 박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나 나의 첫사랑이나 모두 매한가지로

저 사진처럼 아름다왔을 그 시간이 충분히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