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7주차: 영화의 여백 채우기

1andau 2012. 5. 25. 02:05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건축학개론을 보면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면이 확실히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같은 사랑영화의 명작들을 만든 거장이다.

허진호 감독에 대해 많이 나오는 평들 가운데 하나는

동양화처럼 '여백'이 있는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는 아름답게 찍는 양반이 생긴건 꼭 소도둑놈 같다는....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이용주 씨도

자신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확고하게 취향을 밝힌 바 있다.

 

 

이 양반도 영화는 아주 예쁘게 만들면서 생긴건 완전히 산적두목 스타일...

 

그래서 그런지 건축학개론도 여백이 많은 영화다.

여백이 많다보니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고 관객이 상상할 거리가 많은건 좋은데,

문제는 그 여백을 잘못 채워 상상하면 영화 전체가 오해받기 쉽상이라는 거다.

앞서 내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은 강의들도

결국 그런 잘못된 여백 채우기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였다.

 

그 비어있는 여백을 가장 올바르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아마도 편집에서 삭제된 장면들을 포함한 감독판/DVD판 영상과

각색되기 전의 원전 시나리오,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 내용들이 아닐까 한다.

감독판/DVD판은 아직 안 나왔으니 제외하고,

지금으로서는 각색되기 이전의 원전 시나리오가

감독이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는 각색 전의 원전 시나리오가 떠돌아 다니고 있는데

개봉된 영화에 비해 내용이 다른 부분이 꽤 많다.

영화보다도 직설적이어서 애매한 '여백'이 훨씬 적고 이해하기가 쉽다.

이용주 감독이 인터뷰에서 여러번 언급한 '건축과 공간'에 대한 내용도 더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명필름 2011'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감독이 2003년에 썼다는 오리지널 원작은 아닌 듯 하고,

아마도 각색 작업을 거치기 직전 단계라고 짐작된다.  

 

시나리오를 읽어 보면 아래와 같은 부분들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와 다르다.

 

1) 이혼한 서연은 무직자가 아니었다.

아나운서는 되지 못했지만 케이블 방송의 리포터 일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단순한 리포터가 아니라 메인 MC로 승격이 내정되는 장면도 도중에 있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시나리오의 과거 부분은 2003년 초고부터 크게 변한 것이 없지만

현재 부분은 수정이 많이 가해져서 별별 버전이 다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서연이 한물간 걸그룹 멤버라는 설정도 있었고,

(수지가 걸그룹 아이돌이니 어쩌면 이쪽이 더 대박이었을지도....?)

서연이 이혼녀가 아닌 그냥 노처녀이거나 승민에게 약혼녀가 없는 설정도 있었다고 한다.

 

첫사랑을 이혼한 무직자로 만들어 버리면서 남자주인공은 어린 여자와 결혼해 미국가는건

남자들의 잔인함을 나타내는 거라고 입에 거품 물던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2) 초기 설계 과정에서

서연이 집구조에 대하여 갖가지 기발한 의견을 내고

승민은 그걸 타박하는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영화에는 없지만 건축학개론 홈페이지의 '첫사랑 아이콘' 홍보영상에 일부 나온다. 

 

 

 

 

 

 

 

3) 현재의 서연이 승민을 보고 왜 이렇게 뺀질뺀질 해졌느냐, 전에는 안 그랬지 않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니까 엄태웅의 뺀질함과 이제훈의 숫기 없음이 이질감을 주는 것은 

두 배우의 연기가 달랐던 탓이 아니고 원래부터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던 거다.

 

4) 전에도 언급했듯이, 원래 서연의 고향은 제주도가 아니라 춘천이었다.

제주도는 촬영하면서 경치가 더 좋은 곳으로 설정이 바뀐 것이다.

 

 

춘천 사진  

 

제주도는 조선시대 유배지였다면서 서연의 제주도 귀향을 '유배당한 것'으로 해석하여

귀양지로 첫사랑을 유배시켜 버리는 내용이니까 건축학개론은 잔인한 복수극이라고

입에 거품 물고 비난하던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5) 서연은 고향(제주도/춘천)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유학 온 것이 아니고

초등학교 이후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떠돌아 다녔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용주 감독은 어떤 언론 인터뷰에서

서연은 과거에는 떠돌다가 현재에는 정착하려는 인물이고

승민은 과거에는 정착해 있다가 현재에는 떠나려는 인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6) 서연은 자신만의 공간/집에 굉장히 집착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원전 시나리오에서 서연은 영화와 달리 아버지 친구분 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릉의 이모 집에 얹혀 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방이 모자라서 사촌동생과 한 방을 쓰고 있는데

사촌동생이 계속 불평을 늘어놓아 이모의 눈치를 보며 갈등하는 장면이 나오고,

서연이 자신만의 공간을 갈망한다는 암시가 굉장히 강하게 비춰진다.

 

7) 서연이 정릉의 빈 집을 청소하고 '내 집'이라고 하는 이유는

불편한 이모집 더부살이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모나 사촌동생과 갈등한 뒤에 빈 집에 가서 혼자 앉아있는 장면이 나온다.

 

 

짜안~~ 여기 내 집이다아~.

 

나는 개인적으로 건축학개론의 빈 집 장면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그 빈 집을 아기자기한 첫사랑에 흔히 등장하는 '둘만의 비밀스런 공간'이라고 해석했는데

원전 시나리오를 보면 조금 오버한 해석이었던 듯 하다.

서연은 그냥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 뿐이었다.

 

6,7번의 장면들은 서연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데

왜 영화에서는 빠졌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촬영했는데 편집된 것인지 아니면 시나리오가 각색되면서 아예 빠져버린건지?

 

또한, 개봉된 영화에서는 과거 부분에 승민없이 서연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첫사랑 이야기가 남자(승민)의 시점으로만 전개된다는 불만들이 많았는데,

원전 시나리오의 6,7번의 장면들을 보면 서연이 혼자 등장하면서 그녀의 시점에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남자의 시점에서만 그려진 첫사랑'이라는 비판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물론 남자가 시나리오를 썼으니까 남성적인 관점이 많이 들어가 있겠지만

최소한 원작에서는 일방적으로 남자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8) 과거 서연이 정릉에서 느닷없이 개포동으로 이사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이모의 불평과 구박을 알고서 춘천 집을 담보로 어렵게 빚을 얻으면서까지

'서울 애들한테 기죽지 말라고' 일부러 비싼데 집을 얻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전 시나리오에서는 서연의 집이 반지하가 아니고 3층이었다.

 

학교는 신촌인데 굳이 반지하의 나쁜 환경을 무릅쓰고 강남에 방을 얻은 서연을

속물이나 요망한 여우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9) 서연의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강남선배인 것 같다며 승민이 납득이와 고민을 상담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원전 시나리오를 인용해 보자.

 

납뜩이: 걔 임자두 있다며?

승민: 걔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니깐!

납뜩이: 니 선배라며? 강남 살고 차도 있고.

승민: ...

납뜩이: 그냥 잊어. 새끼야. 원래 첫사랑은 잘 안되라고 있는 거야.

           잘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극장판 영화에서 납득이가 승민에게

'소주를 마시고 여자를 불러낸 다음 그냥 아무말도 않고 뒤돌아 가라, 뒷모습이 컨셉이다'

라고 조언해주는 코믹한 장면은 원래 이 삭제된 부분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절대 뒤돌아 보지마. 뒷모습이 컨셉이야.

 

이 삭제된 부분을 보면, 내가 2주차 강의에서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온 내용,

그러니까 승민은 자신에 대한 서연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렷이 알 수 있다.

감독이 왜 이 부분을 영화에서 빼 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부분이 남아있었다면 종강날 밤 사건 때 승민의 행동을 관객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파란 색으로 표시한 대사는 이 영화를 언급할 때 빈번히 인용되는 인기 대사인데

황당하게도 극장판 영화에는 저 대사가 안 나온다는 사실이다. ^^;;;

납득이의 저 대사는 메인 예고편에만 나온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널리 알려진 승민의 대사도

원전 시나리오의 같은 장면에 포함되어 있지만

개봉된 영화에서는 편집되어 버렸고 메인 예고편에만 나온다.

대사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승민이 서연의 마음을 몰라 고민하는 이 부분을 찍기는 찍은 모양인데,

무턱대고 삭제해 버려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

 

 

10) 각색 전 시나리오에서는 놀랍게도 문제의 그 종강날 밤 사건에서

강남선배가 키스를 시도했을 때 서연이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강남선배와 서연이 진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승민이 목격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서 강남선배가 서연의 가슴을 만지고 서연은 저항하지 않는/못하는 자극적인 장면까지 나온다!

헉.... -_-;;;; 이 영화 원래는 그런 영화였던 거야?

 

유연석(영화 속 강남선배 역할을 맡은 배우)도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시나리오에서는 강남선배와 서연이 키스를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촬영 현장에서 서연이 키스를 거부하는 것으로 갑자기 변경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10번 장면이 극장판 영화에 있었다면,

다른건 몰라도 종강날 밤 승민의 행동만큼은 이해 못하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영화 내용에 대한 그 수많은 잘못된 리뷰들도 생겨나지 않았을텐데.

 

11) 서연은 방송반을 1학년 때까지만 하고 그만뒀으며

그 이후로 방송반 사람들과 교류가 전혀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부분에서 승민은 노골적으로 강남선배와도 그 뒤로 전혀 관계가 없었느냐고 캐묻고,

서연은 씁쓸히 웃으며 그 뒤로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답하고 있다.

 

 

12) 서연이 먼저 '종강날' 이야기를 꺼내면서 뭔가 해명하려 하고 싶어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도 원전 시나리오에서 직접 인용한다.

극장판 영화에서 아래 사진에 해당하는,

집을 다 짓고 두 사람이 거실 소파에 앉아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서연: 승민아. 기억나?승민: ...서연: 그날... 승민: ...서연: 건축학개론 마지막 날...승민: ...서연: 그날... 너 수업 안오고...

(승민,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가...)

승민: 글쎄. 기억이 잘 안난다. (웃는)서연: ...

 

13) 승민이 과거의 종강날 밤에 관해서 그날 왜 그랬냐고 서연에게 화내며 따져 묻는 장면도 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로 원전 시나리오에서 직접 인용한다.

극장판 영화에서는 아래 사진에 해당하는,

승민이 15년전의 2층집 모형을 발견하고 버럭 화를 내는 부분이다.  

 

 

 

승민: 그래. 그날!

서연: ...

승민: 왜 그랬어?

서연: ...

승민: 그날... 왜 그랬어?

서연: (웃는) 그러게. 왜 그랬을까?

승민: ...

서연: 기억이 잘 안나. (웃는)

승민: (버럭) 근데 이걸 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건데!

 

원전 시나리오의 11~13번 장면들을 보면

대놓고 직접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승민이 왜 그런 모진 소리를 하고 떠나갔는지

서연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반면에, 개봉된 영화의 내용만으로는

서연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고 기대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14)  영화와 달리, 서연의 아버지는 완공된 집에 들어가 살기 직전에 사망하고

새롭게 지어진 집에는 서연만 혼자 들어가 살게 되며, 

서연이 새 집에서 홀로 외로워 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15) 니가 내 첫사랑이었다는 서연의 고백을 들은 후에

결혼을 앞둔 승민이 흔들리면서 서연에게 다가가려 하고,

서연은 그런 승민을 은근히 밀어내며 거절하는 장면들이 여럿 연이어 나온다.

 

결말은 영화판과 똑같지만,

현재의 서연과 승민의 관계에서 좀 더 자극적인 뭔가를 바랐던 관객들의 기대에는

원전 시나리오가 더 잘 부응했던 셈이다.

 

16) 서연이 간직하고 있던 승민의 고백용 2층집 모형을 승민에게 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너의 첫작품이잖아'라고 말하면서.  

 

17) 원전 시나리오에는 철자 틀린 짝퉁 Geuss 티셔츠에 관한 일화가 전혀 없다.

 

 

 

건축학개론 중독 증상: guess를 geuss라고 써놓고도 자기가 뭘 잘못 썼는지 모르게 된다.

 

 

18) 첫 눈 오는 날 빈 집 장면에서 서연이 CD를 놓고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처음 빈 집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멈춰있는 시계에 태엽을 감아서 살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개봉된 영화와는 다르게,

승민이 나중에 빈 집에 갔다가 CD를 발견하면서

첫 눈 오는 날 서연이 빈 집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는 암시가 전혀 없으며,

승민이 CD를 15년간이나 간직하고 있었다는 내용도 없다.

 

 

 

19)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승민이 서연에게 보내는 것은 CD와 CDP가 아니고

돌려받은 고백용 모형에 붙어있던 2층집 그림이다.

 

 

 

 

영화 마지막에 완공된 집의 전체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나오는데

극장 개봉 영화에서는 과거 서연이 살고 싶다고 그렸던 2층집과

현재에 완성된 새 집 사이에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반면에 원전 시나리오에서는 두 집이 아주 많이 닮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이 돌려보낸 그림과 완공된 새 집이 서로 닮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끝난다.  

 

 

서연:  15년전에 그렸던 2층집이랑은 별로 안 닮았네.... 승민이 녀석 좀 비슷하게 지어주지. 눈치없기는..

 

20) 극장판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출시될 DVD 판에는 수록될 거라고 언론에 보도된 3장면,

 

그러니까 엄태웅과 한가인의 키스신에 연이어 나타난다는 이제훈과 수지의 가상 키스 장면,

 

 

 

 

술취한 한가인을 엄태웅이 펜션에 데려다 눕히고 그냥 나온다는 장면,

 

 

 

 

엄태웅이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 납득이가 보인다는 장면

 

 

 

등등은 모두 각색 전의 원전 시나리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1) 원전 시나리오에서는 강남 vs 강북의 지역 대립이 아주 약하고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다.

 

강남과 강북 이야기는 각색 과정에서 덧붙여 강조된 것으로 짐작되며

애초에 감독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