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10주차: 건축학개론의 빛나는 별, 배수지 - 배우와 캐릭터

1andau 2012. 5. 30. 03:22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이 영화의 주요 배우들을 꼽으라면 당연히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배)수지, 

그리고 조정석(납득이)일 것이다. 

 

 

 

내 생각에 엄태웅은 딱 필요한 만큼 연기를 해낸 것 같다.
마침 작년 가을에 히트했던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건축학개론에서의 역할과도 잘 연결됐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라노에서 엄태웅이 자기 잘못을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두 영화를 모두 관람한 일부 관객들에게
'잘못은 승민 자신이 저질러 놓고 죄는 서연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오해를

더욱 증폭시키는 부작용도 있었던 것 같다.
잘못은 남자가 하고 공연히 화내며 여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이지 건축학개론은 아니다. 
 

 


한가인은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말아먹을 수준도 아니었다고 본다.
별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가인이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객관적으로 분명히 미인이기는 한데, 뭔가 내 취향에 안 맞기 때문인지
'말죽거리 잔혹사'로 데뷔했을 때부터 그냥 괜찮은 여배우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학개론의 현재 부분에서

'돌아온 첫사랑' 한가인의 미모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다.
한가인처럼 아리따운 옛 애인이 무작정 첫사랑 남자를 찾아온다는 설정이
남자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어느 페미니스트의 지멋대로 분석은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엄태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가인도 전작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남자주인공의 첫사랑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온 첫사랑 역할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에서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단연코 이제훈일 것이다.
이제훈은 영화에서 감정선을 책임지는 가장 어려운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이 영화를 관람한 중년 남성들의 격한 감정이입과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건축학개론이 단순히 미남미녀 배우들의 학예회가 아닌 영화다운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이제훈의 연기력 덕분이었다고 본다.
영화 고지전이나 드라마 패션왕의 날카로운 미남이
건축학개론에서는 저렇게 꺼벙하면서도 사랑스러운 1학년 남학생으로 변신하는걸 보면
이 배우의 연기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납득이(조정석)는 아마 관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납득이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나한테 납득이 같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인터넷 리뷰들의 스포일러 탓에
영화를 보기 전에 납득이의 농담을 상당부분 미리 알아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납득이에 대해서 한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자면,
납득이는 잔잔하고 동양화 같은 느낌의 이 영화에
코믹함을 불어넣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는 '그 시절 스무살 남자의 일반적인 연애관'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의 행동이나 말 한마디를 가지고 무슨 의미인지 고민할 때
당시의 일반적인 20세 남자가 상식적으로 내릴 결론을 대화로 말해주는 역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배우는 누가 뭐래도 수지일 것이다.
수지가 연기한 과거의 서연은 수많은 중년 남자들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던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내면서,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과거 부분의 영상을 순식간에 픽션이 아닌 리얼리티로 바꿔버렸다.
어떤 인터넷 리뷰의 멋진 표현을 빌려보자면,
수지는 30~40대 남자들에게 '첫사랑의 그녀를 소혼하는 역할'을 해낸 거다.

 

"이 영화 시나리오가 처음 쓰여졌던 2003년에 수지는 겨우 9살이었다더라.
수지가 자라기를 기다리느라 이 영화의 제작이 이렇게 늦어졌나 보다"
라고 이용주 감독이 감격에 겨워 이야기 했을만큼,
건축학개론의 성공에 과거 서연을 연기한 수지의 기여는 엄청나게 크다.
아마 엄태웅과 한가인은 다른 배우가 연기했었어도
영화의 성패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훈은 그만한 연기력을 갖춘 젊은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실력있는 젊은 연기파라면 누군가 대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정석도 마찬가지.

 

그러나, 수지가 연기한 과거의 서연만큼은
누군가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절대로 이만큼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 때 이 영화의 서연 역으로 이영애나 문채원이 고려되었다던데,
그랬다면 관객이 아마 100만명은 줄어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지 말고 그 누가 건축학개론의 과거 서연 역을 이렇게 잘 해낼 수 있었을까?

 

 

문채원이 서연....? 글쎄....?

 

수지가 대학 1학년 시절 첫사랑의 그녀를 성공적으로 연기한데에는
타고난 여러가지 요소들이 운좋게 작용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지는 건축학개론을 촬영할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고 하는데,
1990년 그 당시만 해도 여대생들이 
지금만큼 세련되지 않았던 반면

2012년 지금의 여고생들은 당시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기 때문에,
고교 2학년인 수지가 별다른 분장없이 대학 1학년을 연기했어도 전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고
'정확하게 복원된 그 시절 1학년 여대생'으로 
중년 아저씨들에게 비쳤던 거다.

 

 

솜털 뽀송뽀송한 20세 전후 여자아이들의 고운 턱선.

이거는 조금만 나이들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흉내낼 수 없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제작자인 명필름 심재명 사장의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나이 많은 여배우가 억지로 어린 척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이대가 맞는 수지가 연기하니까 관객들의 만족도가 더 높았다.'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났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어떤 신문기자가 써놓은 다음과 같은 글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수지는 평생 단 한번 밖에 찍을 수 없는 영화를 찍었다.'

 

 

 

수지의 '제대로 첫사랑다운' 마스크도 성공에 큰 몫을 했다.
'첫사랑 그녀'는 무턱대고 미모가 뛰어나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일단, 영화 속의 첫사랑 그녀가 예뻐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남자가 예쁘지 않은 여자랑 첫사랑에 빠졌을 리 없지 않은가?
첫사랑의 그녀들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전부 다 예뻤을 수 없다는건 당연한 소리지만,
남자아이들은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그녀가 예뻐보였기 때문에 첫사랑에 빠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건 영화건 남자 입장에서 첫사랑은 무조건 예쁘게 묘사되는 것이고,
수지는 분명히 그런 미화된 기억에 부합될만큼은 충분히 예쁜 배우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점은,
첫사랑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대 천박하거나 섹시한 느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첫사랑 그녀의 실물이 실제로 그랬건 아니었건 상관없이
첫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투영되는 그녀의 이미지는 대개 단아하고 청순한 미모다.
이용주 감독이 '첫사랑이 섹시하면 이상하지 않아요?'라고 했다는 발언의 핵심적인 의미가 바로 이거다.

 

 

첫사랑이 이런건 곤란하다니깐요....


나는 티비에서 우연히 수지를 보게될 때마다

쟤는 걸그룹 아이돌인 주제에 걸그룹 아이돌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곤한다.
건축학개론에 열광했던 30~40대 남자들에게 걸그룹 아이돌의 이미지는
약간 천박하게 싼티나면서 적당히 벗어부치는 날라리의 느낌이다.
그래서, 만약 건축학개론의 서연 역할을 수지가 아닌 다른 아이돌이 맡았다면
틀림없이 영화 말아먹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스에이 그룹에 속해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는 수지도 마찬가지 느낌이지만,
짙은 화장을 지우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때는
전혀 딴판으로 약간 귀티나고 고전적인 미모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다르다.
건축학개론을 보기 전에 우연히 
'여자 아이돌 가운데 누가 제일 예쁘냐'는 이야기를 아내와 나눴던 적이 있는데,
수지가 제일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고 답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남자들 다 그러더라. 사람들 보는 눈이 다들 똑같은가 보네.'
라고 했던 것을 보면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수지가 연기한 과거 서연이 성공적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첫사랑 이미지에 걸맞게 단아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던 덕분이다.

단순히 나이대가 일치하는 예쁜 아이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수지가 제일 예쁘게 나왔다고 생각하는 장면.

사진으로는 좀 아니지만, 실제 대형 스크린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청순미 쩐다.

 

이러한 기본적인 장점에 더해서 수지가 가졌던 또 다른 장점은 자연스러운 미모다.
남자들의 첫사랑은 대개 주변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감을 얻으려면 아름답기는 하되, 이웃집 소녀같은 약간 현실적인 미모가 필수적이다.

아이유가 대세 소리 들으면서 인기를 끄는 이유도 친근감있게 '적당히 예쁜' 미모 덕분인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예쁜 외모의 여배우가 첫사랑 역할을 하면
보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남자들 입장에서 감정이입 하기가 어려워진다.
많은 첫사랑 영화들이 여주인공을 예쁘게만 찍으려고 하다가 

남자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서울 촌놈!

 

수지의 광팬들이나 삼촌팬이 들으면 분기탱천할 소리겠지만,
수지가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수지는 물론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매에 날카로운 구석도 있고 광대뼈가 도드라져서 얼굴선에 약간 각이 져 있으며

입술도 상당히 두껍고 몸매도 연예인 치고는 굵은 편이어서
아무리 좋게 봐도 완벽한 미모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지의 씩씩한 행동을 보고 이용주 감독이 '군인같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
'15년 세월은 떡대도 없애주나? 라는 어느 여성 관객의 지적대로 어깨가 넓어서 떡대도 상당한 편이다.
건축학개론의 남자 관객들 상당수가 남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했던 데에는
수지의 예쁘고 귀티나지만 현실적인 미모도 크게 한몫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은근히 한 떡대하는 수지

 

수지가 타고난 외모의 또 한가지 장점을 지적해 보면,

좀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예쁜 반달눈을 꼽아야겠다.

웃을 때 눈이 아래쪽으로 오목하게 휘어지는 반달눈은
청순하고 예쁘면서도 '귀여웠던' 첫사랑 소녀 이미지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달눈을 가진 여배우들 가운데 최고 극강은 역시 손예진인데
눈웃음 칠 때 또렷이 드러나는 손예진의 반달눈을 보면
왜 이 여배우가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손예진은 첫사랑 역할을 많이 맡아서 첫사랑의 상징이 된 것이 아니고,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첫사랑 역할을 자주 맡았던 거다.

 

수지의 평소 인상은 눈매가 날카로와서 기가 센 느낌마저 주지만
(미스에이로 무대에 설 때는 화장으로 강조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무대화장 지우고 웃을 때 보면 또렷한 반달눈이 나타나면서
청순함, 귀여움, 친근함, 순수함 등을 남자들이 한꺼번에 느끼도록 해준다.

 

 

 

이런 반달눈은 배우에게 친근한 인상을 부여해서 

마치 그 시절 예뻤던 이웃집 소녀, 같은 과 여학생, 소개팅했던 그녀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첫사랑 그녀 역할을 하려는 여배우에게 아주 중요한 플러스 알파가 된다.

 

 

 

이런 외모의 자연스러움에 더해서,
연기의 자연스러움 또한 수지가 중년 아저씨들의 첫사랑 그녀로 빙의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지가 엄청나게 대단한 연기력을 구사했다는 뜻은 아니다.
감독이나 수지의 여러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수지는 작위적인 '연기'를 해낸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를 영화에서 표출한 것 뿐이다.
감독이 수지에게 '그냥 평소에 너 하던대로 해라'라고 지시했다는 일화나,
영화를 관람한 수지의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영화 속의 서연이 바로 평소의 수지 그대로'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보면,
애초에 수지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누군가의 언급처럼 '자신에게 꼭 맞는 맞춤옷 같은 배역'이었던 거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영화 속의 과거 서연을 이렇게 확실한 캐릭터로 형상화시킨 공로자는
배우인 수지가 아니라 감독인 이용주 씨라고 나는 생각한다.
초보 신인감독들은 의욕이 넘쳐 오버하기 쉬운 것이 보통인데,
이용주 감독은 연기력도 충분치 않은 아이돌을 데리고 안 되는 연기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대신에
수지에게 이미 그 시절 여대생의 모습이 있음을 간파하고
억지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화면에 비치도록 노련한 연출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연스러움이 완전히 적중해 버려서
건축학개론 속의 수지는 '1990년 예쁜 1학년 여대생' 그 자체로 형상화 될 수 있었다.

영화화 되기 전의 원전 시나리오를 찾아서 읽어보면,
원래 대학시절 서연의 캐릭터는 귀엽고 선이 가늘며 약간 장난기 있는 타입이다.
반면에 영화 속의 수지는 터프한 성격에 승민을 꽉 잡고 흔드는 스타일인데
이런 부분이 아마도 수지의 실제 성격이 반영된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야! 이거 들어. 나 무거워.


요약하면, 수지의 연기가 건축학개론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타고난 첫사랑 스타일의 미모와 꼭 맞는 나이대와 적절한 캐릭터의 3박자가 운좋게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지 광팬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겁나기는 하지만,
수지가 건축학개론에서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평소 스타일 그대로 연기하는 것을 연기력 좋다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사랑영화의 명작 '클래식'의 팬들 사이에서는 쫌 알려진 이야기인데
클래식 촬영 현장에서 손예진과 조승우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영상에 찍혀있는 손예진의 표정을 봐라. 사랑에 빠진 여자의 표정이 그렇게 애절할 수 없다.
연기력이란 바로 이런게 연기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지의 연기력을 무작정 폄하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
이 영화에는 수지에게 상당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장면이 두 군데 있다.
첫번째는 승민에게 '꺼져줄래?'라는 대사를 듣는 장면이고 두번째는 첫 눈 오는 날 빈집 장면이다.
둘 다 일반적인 고2 여자애가 '평소 하던대로 행동'해서는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장면들이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승민에게 꺼져줄래? 라는 대사를 듣는 이별 장면에서
수지의 표정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아깝지 않을만한 명연기였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영화본지 백만년도 더 되어서
그게 언제였는지 도무지 기억조차 안 나는 40대 중년인 내가
근무하는 학교와 가깝다고는 하지만 내 돈 내고 극장가서 영화를 본 계기는
순전히 예고편과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에서 수지의 표정을 보고 끌렸기 때문이었다.

 

계속 승민이 자신을 피하는 것을 알고,

 

 


약간 화가 나 있으면서도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걱정하는 표정에서 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을 예감하며 짓는 서글픈 표정을 거쳐서

 

 


그만 연락하라는 승민의 말에 당황과 놀라움과 이건 아닐꺼야 바라는 처연한 표정,

 

 


그리고 꺼지라는 승민의 무시무시한 말투에 충격받는 그 표정까지,


내가 첫사랑 그녀에게 모진 소리 내뱉으며 이별을 고했을 때

그녀의 고운 얼굴에 보였던 그 모든 표정들이
수지의 표정에서 그대로 고스란히 재현되었던 것이다.

 

수지는 내 첫사랑과 전혀 안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장면에서의 표정만큼은

이별하던 날 내 첫사랑 그녀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지막에 이제훈이 ‘꺼져줄래?’라고 했을 때 수지의 표정
내가 이 배우와 함께 뭔가를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이용주 감독이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이다.
건축학개론의 이별 장면에서만큼은 수지의 연기가 최고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듯 하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이 첫 눈 오는 날 빈집 장면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장면에서 수지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눈이 그칠 때까지 승민을 기다리다가 CD를 놓고 가기로 마음먹는 그 순간의 표정,

 

 

 

혹시나 하던 일말의 기대를 접으면서 수지의 얼굴에 나타나는
그 아쉬움과, 그 안타까움과, 그 애절함과, 그 고운 마음이 배어 나오는 표정,

 

 

 

마음으로 첫사랑을 끝내는 순간 뭔가 성장하며 더 이상 소녀가 아닌 듯한 그 표정,

 

만약 수지의 그 첫 눈 오는 날 빈집에서의 표정 연기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다.

 

이 두 장면에서 수지의 저 엄청난 표정 연기는

건축학개론을 관람한 많은 관객들을 펑펑 눈물 쏟게 만들면서

수지가 운좋게 잘 맞는 배역을 맡은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라 

건축학개론의 성공에 걸맞는 훌륭한 연기력을 가졌음을 입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덧붙여 한 마디 하면,
수지의 연기가 빛을 발했던 이 두 장면은
다운로드 받은 파일로 컴퓨터 화면에서 봐서는 그 맛이 잘 나지 않는다.
불꺼진 어두운 극장에서 큼직한 화면으로 봐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컴퓨터에서만 봤거나 DVD로만 봤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감동을 놓쳐버린 거다. 

기껏해야 불법 다운로드 파일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고서는

건축학개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논하지 마라. 

그건 영화를 절반 밖에 못 본거나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