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5주차: 건축학개론의 오해 (4) - 그건 범죄야, 범죄!

1andau 2012. 5. 22. 20:04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건축학개론에 관한 어느 인터넷 댓글에 보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가지고 벌어진 토론을 볼 수 있다.

물론 원래 주제는 승민과 서연 가운데 누가 더 불쌍하냐 였지만

코믹하게도 결론은 서연이 정착한 제주도 위미리의 정아 피아노학원 원장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나버렸다.

 

 

 

이유인 즉슨, 그 조그만 마을에 피아노학원이 또 하나 생긴데다가

경쟁학원 원장은 서울의 빠방한 명문음대 졸업생이니 경쟁이 되겠냐는 것이다.

더구나 새롭게 생기는 경쟁학원 원장은 왕년의 정아 피아노 학원 수강생.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각색되기 이전 건축학개론의 원작 시나리오를 보면

서연의 고향은 제주도 위미리가 아니라 춘천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용주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명필름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이왕이면 경치좋은 제주도를 서연의 고향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했으며

감독 생각에는 지방 소도시면 어디나 상관없었기 때문에 제주도로 배경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 설정변경이 그만 피아노학원 원장을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거다.

춘천 정도 되는 도시라면 피아노 학원 하나 더 생긴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위미리처럼 작은 마을에 피아노 학원이 2개씩이나 되어버리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저는 성폭행범이 아니라니깐요....

 

그럼 이 영화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

농담삼아 말해보면 내 생각에는 바로 강남선배 재욱일 것 같다.

영화 속 설정이 억울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여성 관객으로부터 강간(미수)범 취급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말이다.

 

건축학개론을 보고난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는

과연 문제의 그 종강날 밤에 강남선배와 서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둘이 같이 잤느냐 안 잤느냐 하는 문제다.

 

이용주 감독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그 질문의 답은 관객 개개인의 성윤리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던데,

나보고 의견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 둘이 함께 잤느냐 안 잤느냐는 영화 줄거리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

라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이전 강의에서 이야기 했듯이,

승민이 절망한 이유는 서연의 순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서연이 사랑하는 대상이 강남선배라는 오해였기 때문이다.

승민의 입장에서는 서연이 사랑하는 대상이 강남선배라고 확신해 버리면,

어차피 내 여자도 아닌데 그 다음에 둘이 잤거나 말았거나 별반 상관이 없는거다.

 

물론 서연의 속마음을 알게(오해하게) 되는 과정이 하필이면 그렇게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순진한 대학 1학년에게는 더 충격이 컸을 수도 있고,

또 사랑하던 여자가 이미 다른 남자와 자버렸다는 오해가

그 이후 서연에게 아예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서연과 강남선배가 잤건 안 잤건

어차피 승민은 서연의 사랑이 강남선배라고 오해해 버렸고

둘 사이의 이별은 그걸로 정해져 버린 거다.

예를 들어, 승민이 목격한 장면이 영화와 다르게

정신 멀쩡한 서연이 강남선배와 손잡고 귀가하다가

'오빠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키스만하는 장면이었다면

그리고 강남선배는 문 앞에서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장면이었다면

첫사랑의 결말이 달라졌을까?

아마 승민은 똑같이 납득이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서연과 다시 만났을 때 똑같이 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승민은 서연이 선배와 잤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도 역시 그날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영화 줄거리를 떠나서 역시 궁금하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별일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전날밤 강제로 순결을 잃은 1학년 여대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명랑하게

그 다음날 아침 쓰레기 봉투를 들고 쫄랑쫄랑 집을 나서는 서연의 모습 때문이지만,

 

 

명랑소녀 양서연

 

간접적이면서도 좀 더 나를 확신하게 해주는 근거는

재욱과 같은 '제비' 또는 '바람둥이'들의 행동 방식이다.

 

나는 영화 속의 강남선배와 같은 바람둥이들을 두 명이나 알고 있다.
한명은 친구 형님이었고 한명은 서클 선배 였는데,
영화와 같은 식으로 여자들 많이 후리고 다녔다.

둘 다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컸고 돈도 많았다.

많은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

 

 

후훗... 이 놈의 인기는...

 

이 사람들, 영화 속의 강남선배처럼 술먹여 놓고 여자 함락시키는 짓도 곧잘 했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 선배들에게 넘어간 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남자를 고발하거나 강제로 당했다고 호소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제비짓을 하고 다녔어도 한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영화를 오해하는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저런 제비들은 절대로 고발당하거나 발목 잡힐 일을 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술먹여 놓고 강제로 여자를 강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나하면 법적인 문제라도 생길 경우 잃을 것이 너무 많은 혜택받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재욱이나 내가 아는 제비족들은 

그들의 매력이 여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때문에

맨정신으로는 조심스러워 하는 여자라도 적당히 술을 먹여 경계심을 해제시키면
손쉽게 여자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같은 남자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지 뭐. -0-;;;)
여자가 거부하면 절대로 강제로 하려들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제발로 안겨오는 여자 수두룩한 인기남들이다.

 

 

형, 이거 뭐에요?

 

그래서 나는 문제의 그 종강날 밤에 서연과 강남선배 사이에는 별일 없었다고 생각한다.
서연은 키스 단계에서부터 이미 선배를 거절했고,  
강남선배같은 그 당시 제비들은 싫다는 여자 강제로 범하는 타입의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어서 거부의사를 밝히는 여자를 힘으로 겁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술먹고 정신 잃은 여자를 어찌어찌하는 것 역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쯤은

아무리 순진한 대학 1학년이라도 남자라면 다들 안다.

서연과의 첫 키스를 상담하는 승민에게 납득이가 했던 대사를 생각해 보라.

 

 

니가 한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야. 그것도 자는 애한테. 그건 범죄야, 범죄!

 

여자가 자고 있어서 의식이 없다면 뽀뽀하는 일조차도 범죄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도 승민의 첫키스는 서연이 고발했다면 엄밀히 말해서 성추행에 해당될걸?)

그런데 잘 생기고 키 크고 집안 좋고 돈 많은 제비가

뭐가 아쉬워서 완력으로 술 취한 여자를 건드려 발목 잡힐 일을 하겠는가?

그냥 슬쩍 들이대 보고 여자가 조금만 강하게 거부하면 깨끗이 접는 것이 카사노바다.

 

술김에 분위기에 취해서 남녀간에 사고친 이야기는 첫사랑 이야기 만큼이나 세상에 넘쳐 흐른다.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자들 입장에서는,

술에 취했건 아니건 여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있고 남자가 완력을 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여자가 남자에게 안겨서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가 사고치는 것은

여자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지 제 3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둘이 좋아서 같이 잔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는가?

하물며 여자가 남자의 외모와 재력에 반해서 그 남자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혀왔는데?

그런 상황에서 기껏해야 숙제나 같이 하는 동기 남학생이

그녀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바램이다.

 

 

 

그러니까 강남선배 재욱은, 여자들에게 나쁜 남자일지 몰라도, 강간범이나 성추행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호감있는 여자에게 술을 권하고

여자가 취해서 내숭이 사라지면 분위기 잡아 함께 자려고 했을 뿐이다.

여자가 싫다면 말고.

 

 

저는 정말로 억울하다니까요....

 

건축학개론의 스토리 구조에서 강남선배는 아주 독특한 악역이다.

보통 영화에서 악역은 '쟤만 없었으면 남녀주인공 두 사람이 행복했을텐데 안타깝다'

라고 여겨지는 완벽한 미움의 대상이기 쉬운데,

건축학개론의 재욱은 악역인 동시에 서연과 승민이 처음 만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강남선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처음에 서연이 재욱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음대생인 서연이 건축학개론을 수강해서 승민을 알게될 일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차라리 강남선배가 성폭행범이었다면

문제의 그 종강날 밤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밤 강남선배와 서연이 함께 잤느냐 아니냐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엇갈리는 주제 하나는

서연의 집 문에 귀를 댔을 때 승민에게 들린 소리가 무엇이었느냐 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카사노바 제비들의 행동 방식과 같은 맥락으로,

나는 이 장면에서 승민에게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실제로 상영되는 영화에서도 거의 아무 소리 안 나온다.)

강남선배는 기껏해야 한번쯤 더 집적거려보다가 서연이 몸으로 거부하니까 포기했을 거고

그러면 문 밖으로 들릴만큼 큰 소리가 날 일이 없게 된다. 그냥 조용했을 거다.

 

 

 

문제는, 그렇게 별다른 소리가 안 들리는 상황이 승민의 입장에서는 

강남선배의 여자 따먹기(?) 작업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다라고 해석되기 쉽다는 점이다.

차라리 강남선배가 강간범이었다면 서연에게 힘으로 달려들었을테고

이미 키스조차 거부했던 서연은 비명이라도 질렀을거고

그랬다면 승민은 하다못해 문을 두드리거나 유리창이라도 깨면서 선배를 제지하려고 나섰을거다.

그러면 그날밤 상황에 대한 승민의 오해도 단번에 풀렸을텐데.

 

하지만 서연의 사랑은 자신이 아닌 강남선배라고 이미 오해해버린 승민에게

그 소리없는 정적은 방 안에서 서연이 별다른 거부없이

강남선배와 서로 부등켜 안고 있는 상황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승민은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고.....

 

 

 

문 안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폭행당하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내버려 두고 도망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못나고 찌질하고 병신같더라도 세상에 그런 남자는 없다. 

승민은 차라리 비명소리나 싸우는 소리라도 들리기를 바랐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건축학개론의 그 오해는 역설적이게도 강남선배가 성폭행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