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6주차: 특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배경 연도

1andau 2012. 5. 24. 02:29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영화 건축학개론의 공식적인 배경은

과거 부분이 96년이고 현재 부분이 2011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19964150 이승민

 

 

96년 공과대라고 쓰여있는 플래카드

 

건축학개론이 크게 히트하면서,
영화의 배경인 90년대(중반)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9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라는 둥,
90년대를 주도했던 X세대를 위한 영화라는 둥,
90년대에 불거진 계층 갈등을 묘사한 거라는 둥....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같이 씨알머리도 안 먹히는 개소리들이다. -_-;;;

 

이용주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건축학개론의 원작 시나리오를 처음 쓴 것은 2003년 이었는데

과거 부분은 감독의 대학 1학년 시절인 199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현재 부분은 2003년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원작은 90 학번이 10 여년 정도 지난 30대 초반 시절에 

대학 1학년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용주 감독 자신이 연대 건축과 90학번이며

상영된 영화의 배경년도인 96년에는 이미 졸업하여 직장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랬던 시나리오의 영화화가 계속 지연되면서 2011년에야 촬영이 시작되었던 바람에

2003년은 '현재'라고 우기기에는 너무 오래전이 되었고
흥행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면 2011년이나 2012년을 현재라고 설정할 수 밖에 없는데,
'과거'를 1990년으로 고집하면 현재 승민과 서연의 나이는 무려 40대 초반이 되기 때문에
다시 만난 설레임 어쩌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져 버리는 문제가 생겨버린 거다.

 

거기에 더해서, 감독과 제작자의 인터뷰에 따르면,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다가 엄태웅이 처음 합류하면서 간신히 풀리기 시작했는데엄태웅의 나이가 이미 3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현재를 30대 중반으로 설정할 수 밖에 없었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 간격이 15년으로 벌어지게 되면서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96년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이 영화의 배경연도는 필요에 따라 설정된 것일 뿐,
이야기의 본질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건축학개론의 과거 부분의 실질적인 배경은 1990년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영화의 핵심 뼈대와 무관하게 복고 마케팅을 위해서
작위적으로 덧입혀진 '그때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있다.


삐삐라던가,

 

 

 

CD라던가,

 

 

 

무스라던가,

 

 

 

펜티엄 PC같은 소품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깨알같은 재미'나 영화 마케팅에서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이 영화의 본질적인 시대배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소품들은 늦어진 영화화 때문에 억지로 설정된 96년도라는 배경에 맞추어서

나중에 일부러 덧붙여진 장식품들일 뿐이다.

 

이렇게 작위적으로 시대 배경을 상징하는 소품들을 배치하다 보니 모순도 생겨났다.

 

어떤 사람은 무스와 삐삐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데,

무스는 90년대 초반에 헤어젤에 밀려서 사라져 버렸고

삐삐가 등장한 때는 90년대 중반 이후이기 때문에

무스와 삐삐가 같은 해에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역시 이용주 감독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래 승민과 서연이 주고받는 물건은 CD가 아니고 카세트 테이프였다고 한다.

 

 

 


확실히 1990년에는 CD가 없었고,
이용주 감독이나 내 또래에서는 (나는 이용주 감독과 2살 차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노래를 테이프로 녹음해서 건네주는 것이
호감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나도 그 짓을 여러번 해봤는데,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 주는 것이 CD를 사서 주는 것보다 더욱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호감을 표시하는 방법으로써 훨씬 더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진짜 배경이 96년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화를 꼼꼼히 보면 여러 군데에서 알 수 있다.

 

 

형... 써클.... 재미 있어요?

 

영화에서 이제훈과 수지, 그리고 강남선배는
대학 동아리를 가리켜서 '써클'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 용어는 96년 즈음에는 이미 '동아리'라는 우리말에 밀려서 거의 멸종되어 버린 단어다.
아마도 이 영화의 진짜 배경인 1990년 전후가

대학생들이 '써클'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마지막 시절이었을 것이다.

 

1990년에서 96년으로 설정이 변하면서 스토리가 부자연스러워진 곳도 있다.
인터넷 리뷰들을 읽다 보면 종종 발견되는 불평 가운데 하나가,
'승민이라는 놈은 도대체 왜 몇시간 동안 삐삐 메시지도 확인을 안 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삐삐 확인 안 하는 놈은 또 첨일세....

 

승민과 서연의 안타까운 오해가 생긴 이유 가운데 하나가
종강날 서연이 계속 보낸 삐삐 메시지를 승민이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이 불평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
왜 승민은 그날 몇시간 동안이나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하는 해답은 이렇다.
애시당초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삐삐와 관련된 일화가 없었던 거다.
1990년은 핸드폰이나 삐삐가 없고 유선전화만 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종강날 승민과 서연의 엇갈림은 아주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는 사건이다.

그 때는 한 번 엇갈리면 지금처럼 곧바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내용을 96년 배경으로 변경하면서 삐삐 같은 소품을 억지로 집어넣다 보니

개연성이 부족해지고 '승민이라는 놈은 삐삐도 확인 안하냐?'라는 물음이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CD와 전축을 지적한 사람도 있었다.
96년 즈음 되었을 때는 이미 음악의 디지털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CDP보다 오히려 승민의 집에 있었던 것과 같은 중고 전축 턴테이블이 더 희귀하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96년에 중고 턴테이블을 팔았다면 CDP 따위는 몇 개를 사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집에 CDP가 없어서 서연이 준 CD를 못 듣는다'는 승민의 뼈아픈 이야기가

졸지에 개그로 변해 버리고 만다.

이 부분도 영화의 배경을 원래대로 1990년에 맞추어야 이해할 수 있다.
1990년은 96년과 반대로 중고 전축은 흔해 빠진데 반해서
워크맨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는 가격이 꽤 나가던 시절이었다.

 

 

차라리 턴테이블이 훨씬 더 귀했다니깐....

 

영화의 스토리와 설정이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이 영화의 진짜 배경은 96년이 아니고 1990년인거다.

1990년은 숫자로만 따지면 90년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분위기나 특성에 따라 구분하는 '90년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때다.

80년대의 끝자락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80년대와 90년대의 딱 중간에 있는 전환기로 해석할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1990년 대학생들의 사랑방식도 흔히 말하는 '90년대의 사랑법'과는 달랐다.

그 때까지는 아직 80년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90년대처럼 대학생들이 커플을 이루어 연애하는 일도 흔하지 않았고

90년대보다 순결이나 정절을 더 중요시했었으며

손잡고 다니거나 키스 한번 하는 일이 90년대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건축학개론에 묘사된 사랑 방식은 나의 대학 시절 무렵의 연애 스타일과 잘 일치한다.
내가 이 영화의 이야기를 그렇게 뼈저리게 공감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첫사랑을 경험하던 시절의 사랑 방식과 영화 속의 사랑 방식이 아주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명한 영화평론가인 듀나도 뭔가 모순된 느낌을 받았는지

'근데 90년대 대학 다니던 아이들이 그렇게 순진무구했었나요? 제 기억에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상한게 당연하다.

1990년의 이야기를 96년이라고 해놨으니 어색할 수 밖에 없는거다.

 

1990년과 96년의 불일치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수지의 옷차림이다.
아무리 지방에서 갓 올라왔고 아직 1학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에서 수지의 옷차림은 96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너무 올드한 스타일이라는 지적이 여러군데서 나온다.
맞는 말이다.
내 기억으로도 96년에 여대생들은 이미 수지처럼 입고 다니지 않았다.
특히 이제훈과 수지가 야외로 나가 첫키스 했던 부분에서
수지가 입고 있던 스웨터와 청바지는 완전히 쌍팔년도 촌티가 줄줄 흐른다.

영화속 수지의 옷차림에 대한 인터넷 리뷰 몇 개를 인용해 보자.

 

 

 

'올드한 것도 좋지만 영화에서 수지의 복장은 90년대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너무 옛날로 가버렸다' 

 

'저런 옷은 '화려한 휴가(1980년 배경)'에서 이요원이나 입었을 옷이지 90년대 여대생 복장은 아니다.'

 

 

 

'96년에 수지처럼 입고 다녔으면 공주인 척 한다고 왕따 당했을거에요'

 

 

'우리 수지를 완전히 촌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 분개하던 수지 광팬)

 

 

 

1990년 무렵의 여대생들은 진짜로 영화 속의 수지처럼 입고 다녔다.
나도 바로 그 때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잘 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를 기준으로 하면
영화 속의 수지는 그 당시의 단정한 1~2학년 여대생을 아주 지대로 정확하게 복원해낸 것이다.

설정을 96년으로 변경했으면서도 여주인공 서연의 옷차림 만큼은 굳이 1990년에 맞춘 것은
아마도 감독의 선택이었을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주변의 소품이나 설정은 바꾸더라도,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단아한 차림의 1학년 여대생'
이미지까지 바꾸고 싶지는 않았을거다.

 

 

이런 옷차림은 나를 포함한 이용주 감독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

누가 뭐래도 바뀔 수 없는 '첫사랑 그녀'의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과거를 정확히 복원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96년 무렵 일반적인 여대생 복장을 재현한답시고
배꼽티에 초미니 똥꼬치마를 입고 통굽 하이힐을 신은 여대생

(내가 기억하는 90년대 여대생들의 특징적인 옷차림)을
'추억의 첫사랑'으로 내세웠다가는 틀림없이 영화 말아먹었을 테니까,
감독이 선택을 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용주 감독의 어느 인터뷰 발언: 첫사랑이 섹시하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리얼리티라도 첫사랑이 이러는건 좀 곤란해...

 

그렇기 때문에, 건축학개론은 특정 시대를 잘 복원하고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배경 연도가 굉장히 애매하고 특정하기 곤란한 영화다.
핵심을 이루는 이제훈과 수지의 사랑 방식과 옷차림은 1990년에 맞추어져 있는데,
93~94년에 발표된 기억의 습작, 신인류의 사랑, 칵테일 사랑이 마치 신곡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95년에 발매된 펜티엄 컴퓨터가 손에 넣기 어려운 최신 상품으로 여겨지고 
삐삐의 등장이나 간간히 보이는 숫자들은 배경이 96년이라고 우기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등장했던 주택가의 주차선도 버젓이 화면에 보인다.

 

 

뻔뻔하게 그려져 있는 주택가의 주차선. 이거는 2000년대에야 생겼다고 한다.

 

내 멋대로 짐작해 보면, 감독은 시대 배경을 특정하기를 아예 포기했던 것 같다. 
처음 감독의 구상대로 1990년을 영화 배경으로 하고 2000년대 초에 개봉됐다면
1990년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영화화가 늦어지면서 90년의 정서에 94년의 음악과 96년의 소품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게 되었으니
아예 포기해 버리고 그냥 영화의 핵심 줄거리에만 집중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개봉된 영화를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 봐도

현재 시점이 정확히 몇년도인지 엄태웅과 한가인은 몇 살인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티저 예고편에 딱 한번 '15년 후...'라는 자막이 나올 뿐이다.

내 생각에 감독이 원했던 것은 그냥 '첫사랑했던 과거'와 '재회한 현재'뿐 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포기가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나같은 감독 또래(80년대 후반 학번대)의 40대부터 시작해서
그보다 10년 어린 세대(90년대 후반 학번대)까지
한꺼번에 공감시킬 수 있는 히트작이 되었다.
각 세대마다 공감할 수 있는 소품이나 옷차림이 골고루 등장하게 되었으니까.

건축학개론의 리뷰들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이

88학번부터 97학번까지 모두 '이건 나의 대학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자칫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면 어느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없는 부정확한 짬뽕이 되어버렸을텐데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모순적인 언급들 가운데 하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운운하는 것이다.

90년대는, 특히 영화가 묘사했다고 오해받는 90년대 중반은,

아날로그적인 시대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디지털 시대의 서막이었지.

인터넷도 있고, CD도 있고, 무선통신(삐삐)도 있고, 펜티엄도 있던 시대가 무슨 아날로그란 말인가?

그런데 핵심적인 사랑이야기는 확실히 아날로그 시대 같은 느낌을 준다.

당연하다. 이용주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첫사랑 이야기는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인 1990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거다.
이 영화는 어떤 시대를 묘사하는 복고지향 영화도 아니고,
어떤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적 현상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영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1990년 무렵 젊은이들의 첫사랑을 주제로 삼은 탁월한 사랑영화일 뿐이다.
애초에 시대배경이 특정화 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사랑 영화를 가지고,
90년대 중반에 등장한 갖가지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 짓거리들은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개인적인 포인트를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90년대를 연상시키는 소품들 가운데
삐삐, 무스, CD, 펜티엄 등은 그토록 자주 언급되면서,
유홍준 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다.
서연이 그린 이층집 그림을 승민이 책갈피 사이에 끼워놓는데 그 책이 바로 문화유산답사기이다.
93년도에 출판되어서 나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책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영화에서 90년대를 가장 또렷하게 연상시키는 소품이었다.

 

 

 

궁금한 점 한가지.

그 시절에 정말 압구정동, 서초동, 방배동을 일컬어 '압서방'이라고 하는 농담이 있었던가?

나는 한번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