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4주차: 건축학개론의 오해 (3) - 남녀간의 의사소통 문제

1andau 2012. 5. 22.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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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남자와 여자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 유명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번역된 이후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한국어를 말하고 있더라도

그 의미나 속마음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지만,

그걸 실전에 제대로 적용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남녀간의 화법 차이에 대한 유명한 예가 바로 '밥 한번 살께'이다.

남자들끼리 '언젠가 내가 밥 한번 살께.'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에 불과하다.

남자들 사이에서 '너 전에 밥산다고 그랬잖아'라고 따지면 이상한 놈 취급받는다.

 

남자들이 가장 황당해 하는 여자들의 행동 가운데 하나는

의례적으로 말했던 '밥 한번 살께'를 여자들이 진담으로 믿는다는 거다.

'오빠, 저 밥 사주신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밥 사주세요'

'내가 언제?'

'2년전 군대 가시기 전에 서클룸에서요.'

'2.... 2년전? 헉....'

 

 

힘들면 이야기해. 내가 밥 사줄께.

 

기억도 안 나는 몇년전 밥 사준다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정도는 그나마 약과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은 밥 한끼 사는 정도가 아니라 

무려 15년전 약속대로 집을 지어달라고 승민을 졸라댄다.

 

 

너 옛날에 약속했었잖아. 나 집 지어 준다구. 기억 안 나?

  

 

이거 무슨 빚쟁이도 아니고,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여자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남자와 여자는 그만큼 표현법이 다르다.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과 수지가 주고받는 대화도

얼핏 보면 그 시절 그 나이 또래 어린 연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 받았을만한 

예쁘기만 할 뿐 별 의미없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영화에 대한 여러 감상문들에서

똑같은 대사를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지 알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1) 건축학개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인 야외 데이트 부분을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 남성과 여성의 관점을 대표하는 인터넷 리뷰 2개를  인용해 보자.

 

남자가 해석하는 이 장면

강남 부잣집 선배를 짝사랑한다는 그녀는 남자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난 아나운서가 되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거야.”

너는 아니라는 거다. 

 

여자가 해석하는 이 장면

리포트 핑계로 하필 생일날에 꼭 맞추어서 단둘이 기차여행을 하고

공짜로 집 지어달라고 땡깡부리고

못 마시는 술 마셔가며 잠자는 척 어깨에 기대어서 첫 키스를 기다리는 건

우회적인 고백이며 밀도 높은 프로포즈인 것이다. 이건 엄연한 작업이다.


똑같은 영화, 똑같은 장면, 똑같은 대사에 대해서

남성과 여성의 해석은 이렇게 어이가 없을 만큼 서로 다르다.

 

2) 인터넷에서 적절한 리뷰를 찾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기에 서연과 승민의 해석이 전혀 달랐을만한 대사는 기차길 데이트 장면에서 한군데 더 있다.

 

 

그땐 니가 지어줘. 꽁짜루! 알았지?

 

이 부분에서 서연이 말하는 정확한 대사는 이렇다.

"(아나운서가 되면) 적어도 돈많은 남자랑 결혼할걸.

그래서 나도 나중에 이런데다가 집짓고 살아야겠다.

그때 니가 지어줘. 공짜로. 알았지?"

그리고서는 계약금이라며 승민에게 CD를 건넨다.

 

남자의 해석

앞서 언급했듯이 남자들은 대부분 서연이 '돈많은 남자와 결혼' 운운하는 부분에서부터

'승민이 너처럼 가난한 남자는 내가 결혼할 대상이 아니다'로 해석한다.

따라서 서연의 대사에서 '결혼하는 남자'와 '집 지어 주는 승민'은 같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

결혼하는 남자는 따로 있고, 승민은 그냥 집 지어줄 '친구'일 뿐이다.

빌려주는 CD는 공짜로 집 지어달라는 어이없는 농담을 무마하기 위한 장식품일 뿐이다.

스무살 남자의 연약한 자아는 상처받는다.

 

여자의 해석

니가 건축 잘해서 돈 많이 벌어와.

엄청 유명해진 아나운서 양서연에게 어울릴만큼.

그래서 우리 이런 멋진 곳에 2층집 짓고 함께 행복하게 살자.

(애도 둘쯤 낳고 큼직한 개도 키우고.. 멍멍~~)

우리 집을 함께 짓는 거니까 당연히 공짜인거지?

누가 부부도 아닌데 수억원짜리 집을 공짜로 지어주겠니?

당연히 나중에 결혼하자는 소리지! 그것도 해독을 못하니?

내가 아끼는 전람회 CD 빌려줄테니까 잘 보관하면서 들어야 돼.

전에 개포동 갔을 때 내가 너 하는 거 봐서 CD 빌려주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이제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야. ^^

 

여자의 해석 부분은 남자인 내가 다년간의 연애경험(?)을 바탕으로 그냥 짐작해 본 것이지만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3) 이번에는 집에 CDP가 없다며 승민이 서연에게 CD를 돌려주는 장면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의 관점을 대표하는 인터넷 리뷰 2개를 인용해 보자.

 

남자가 해석하는 돌려주는 CD의 의미 

들을 수 없는 건 음악이 아니라 니 마음

 

여자가 해석하는 돌려주는 CD의 의미 

나 가난해

 

이쯤되면 남자와 여자는 사는 행성이 아예 다르다는 속설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4) 네번째 장면은 여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리뷰가 없기 때문에 남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만 인용한다.

빈 집에서 '너도 재욱이형 좋아하느냐?'는 승민의 질문에 서연이 답하는 장면이다.

 

 

뭐 그래봤자... 재욱이 오빠 나한테 관심도 없고... 나 혼자 삽질하는 거지 뭐

 

이런 대사를 들었을 때 남자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왜 항상 여자의 대답은 이리도 선문답인가?!

승민이가 마음에 드는데 일부러 여우짓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선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인가?!

단정짓기 애매한 느낌이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건축하는 남자 멋있더라'는 알쏭달쏭한 말까지. :)

 

정말 여자들이 하는 말은 완전히 선문답이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 경험에 의해서 조금은 알게된 '여자언어 해석법'을 적용시켜 보자면,

저 시점에서 서연은 여전히 강남선배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지만

단순한 동경의 대상인 강남선배보다는 바로 옆에 서 있는 현실인 승민을 의식하게 되면서

'내가 강남선배를 좋아하는 것은 무의미한 삽질일 뿐,

요즘 관심이 가는 대상은 승민이 바로 너'라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해석된다.

 

서연이 하는 말의 초점은 '나 지금 삽질하고 있어'에 맞춰져 있지만,

승민은 그만 '강남선배를 좋아한다'에 초점을 맞추며 해석해버린 거다.

 

저 장면에서 이미 서연의 마음 속에는 승민에 대한 호감이 자라나고 있었다고 짐작되기는 하지만,

여자들 스스로조차도 잘 모른다는 여자 마음 속을 그 누가 쉽게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어떤 인터넷 리뷰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접 화법을 안 쓰면 도통 모르는 스무살 남자애'가 그걸 알 리 없는 거다.

 

 

 

이 어처구니 없는 남녀간의 차이.

이런 의사소통의 에러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깨어진 커플이 아마 수억쌍은 족히 될거다.

 

건축학개론의 과거 부분의 그 오해와 이별은

어느날 갑자기 생뚱맞게 튀어나왔거나 승민이란 캐릭터가 유별나게 찌질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런 남녀간의 화법 차이에서 생긴 작은 오해들이 한 학기에 걸쳐서 조금씩 쌓이고 쌓이다가

결정적인 계기(종강날 밤 사건)를 만나 폭발해 버린 것이다.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가 탁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과거의 회상 부분은 얼핏보면 그냥 예쁘고 아름다운 첫사랑의 묘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사들 아래에는 남녀간의 의사소통에서 항상 생겨나는 오해들이 중의적으로 깔려있어서

마지막 종강날 밤의 그 사건에 탄탄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제대로 사랑을 하려면 상대가 하는 말의 의미를 해독해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래 문장 또한 인터넷 리뷰에서 인용하는 말인데

'라면 하나 먹고 가라는 말이 사실은 문자 그대로 라면만 먹고 가라는 소리가 아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말하는 대사)을 알아야한다.

 

 

유지태는 라면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에 이영애와 연애할 수 있었던 거다.

 

이런 논리가 잘못된 옆길로 빠져 버리면,

승민이라는 놈은 사랑하려면 당연히 알아먹어야할 여자의 말뜻을

직접화법 아니면 도무지 해독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사랑을 말아먹어도 싸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서 나라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그걸 못하니까 서투른 첫사랑인거다.

여자가 하는 말을 능란하게 해독하는 수준이면 그게 선수지 첫사랑이냐?

 

 

 

비슷한 맥락으로 서연이 좀 더 확실하게 사랑을 표현했어야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승민을 향한 서연의 호감 전달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영화 속 서연의 진심은 심지어 여자들 사이에서조차도 해석이 다 제각각이다.


강남선배는 그냥 연예인처럼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숙제 함께 하자고 따라왔을 때부터 승민을 좋아했던 거라는 해석부터 시작해서,


애초에는 당연히 강남선배를 좋아했던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승민에 대한 애정이 자라난 것이라는 보편적인 해석은 물론이고,

 

승민과 강남선배 둘 다 마음에 들어서 양다리 걸치며 어장관리했던 거라는 해석도 꽤 있으며,


심지어 과거 내내 서연의 마음이 가 있던 상대는 강남선배이고
승민은 '지나놓고 보니 첫사랑이었음을 깨달은' 대상일 뿐이라는 해석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여자들조차 이렇게 헛갈려할 지경이니

서연이 남자가 알아듣도록 충분히 마음을 전달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름 일리는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그걸 못하니까 서투른 첫사랑인거다.

남자가 쉽게 알 수 있을만큼 과감하게 애정을 표시하는 수준이면 그게 선수지 첫사랑이냐?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1학년 여자애도 서투르고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남자만 서투르고 찌질한 것이 아니다.

나는 1학년 여대생이 영화 속의 서연 이상 직설적으로 애정을 표시하는 일이

현실에서 그리 흔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건축학개론이 마음에 든다는 어느 여자분의 리뷰글을 인용해 보자.

 

"내 첫사랑은 아름답고 아련하다기보다는, 어설펐다.
그래서 주는 것도 어설펐고, 받는 것도 어설펐다.
연애는 무엇이며 밀고당기기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끔은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여주다가도 꽁꽁 감추느라 바빴다.


상대방은 아마 이랬다 저랬다 거리는 내 모습에 승민처럼 휘둘리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다른 소녀들도 대부분 다 마찬가지일 거다.

 

마음에 담고 있는 건축학과 소년과 이야기 하면서

"너한테 시집 갈테니 집은 공짜로 지어줘"라고 대놓고 말하는 소녀가 몇 명이나 될까?

선배가 옆에서 "승민이 좋아해? 둘이 잘 해보든지~"라고 이죽거릴 때

"그래요, 저는 승민이 사랑하고 앞으로 사귈 거에요"라고 당돌하게 답하는 소녀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서연과 승민의 행동과 대사들은

누구 한편이 잘했다 못했다를 따져야 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초보다운 서투른 행동과 대화들이 오해의 빌미가 되어아름다운 첫사랑이 깨어지게 된다는 현실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

인 것이다.

 

남자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답게 서투르고 혼란스러워 하며

여자도 첫사랑을 시작한 소녀답게 새침을 떨면서 부끄러워 한다.

양쪽 모두 첫사랑을 시작하는 대학 1학년들답게 아주 자연스레 행동하는데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아주 극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던 거다.

 

 

 

이런 승민과 서연 사이의, 또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게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

라는 유명한 대사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이 대사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입하면

'서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

이라는 의미다.

소통과 이해야말로 모든 사랑의 기본이지만,

첫사랑이기에 서툴렀던 소년과 소녀는 그걸 미처 몰랐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면서도 오해를 낳고 예쁜 첫사랑을 꽃 피워보지 못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