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3주차: 건축학개론의 오해 (2) - '썅년!'과 '꺼져줄래?'

1andau 2012. 5. 21. 15:10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그때 그 시절 1학년 남학생을 대변하는 캐릭터인 승민이

여성 관객들에게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꺼져줄래?'와 '썅년'이라는 발언 때문이다.

  

 

이제 좀 꺼져줄래?

 

2주차 강의에서 잘못된 영화 읽기임을 이미 설명했지만,

종강날 밤의 그 사건이 전적으로 승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승민을 '애인이 성폭행 당하는데 이해못할 이유로 그걸 막아주지 못하고 도망간 놈'으로 간주해 버리면,

잘못은 지가 저지른 주제에 아무 죄도 없는 서연에게

'꺼져줄래?'라고 모진 말을 내뱉고 15년 뒤까지 '썅년'이라고 욕하는 승민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나쁜 캐릭터가 되어버리며,

'건축학개론 속의 승민은 곧 스무살 때의 나'라고 공감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중년아저씨들은

졸지에 똑같이 나쁜 놈들로 매도당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다행히 '종강날 밤의 그 사건'은 승민의 잘못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이더라도,

서연과 제대로 대화를 해 보지도 않고 대뜸 '꺼져줄래?'라는 격한 발언을 해서

아까운 첫사랑을 망쳐 버린 승민의 행동만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경우도 꽤 있다.

 

우선, 앞의 강의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까

종강날 밤 그 사건은 승민이 못난 탓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오해 때문이었음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꺼져줄래?'라는 모진 소리를 내뱉거나 '썅년'이라고 욕했던 행동도

승민이 찌질해서 잘못은 지가 해놓고 죄를 서연에게 덮어씌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승민은 서연이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강남선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뭔가 오해했다는 사실이나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아는 것은 전지적 시점의 관객들 뿐이다.)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데 서연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승민이 서연에게 그런 모진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서연은 승민에게 호의적인 신호도 많이 보냈다.

승민 입장에서는 반대 의미의 신호도 그만큼 많아서 헛갈렸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종강날 밤의 그 사건으로 인해서 승민은 서연의 사랑이 강남선배라고 확신(오해)하게 된다.

 

그 다음에 남자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뭘까?

 

 

나 지금 머리 아프게 열라 생각하는 중........

 

당연히 '그렇다면 서연이 나(승민)에게 보여줬던 호의적인 신호들은 도대체 뭐지?' 일 것이다.

처음에 숙제 같이 하자고 먼저 따라온 쪽도 서연이고,

생일잔치 해달라고 먼저 청한 쪽도 서연이고,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약속 잡았던 쪽도 서연이다.

이런 서연의 행동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였던 것일까?

 

그리고 스무살 대학 1학년 짜리가 내릴 결론도 뻔~하다.

'그년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_-+

 

승민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해석했더라면,

서연이 원래 1순위로 좋아했던 것은 강남선배였고

승민 자신은 선배 대용품인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었으며 

이제 머지않아 용도폐기될 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양다리 또는 어장관리.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 리뷰들을 찾아보면,
서연을 '밀당의 고수'라거나 '어장관리의 달인'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를 꽤 볼 수 있다.

그것도 여자들이!
나는 그런 해석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서연이 승민에게 보낸 신호들이 스무살 남자가 쉽게 알아먹을 만큼 명확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서연의 행동을 양다리나 어장관리로 해석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것을 보면
서연을 오해한 것이 승민의 잘못만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승민이 서연의 행동을 더 부정적으로 해석했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애초부터 서연은 승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따돌림받는 제주도 학원출신이라 친구가 없어서 함께 놀아줄 심심풀이 땅콩 같은 존재도 필요했고,

타과생이 건축학개론 듣는데 숙제를 도와줄 건축학 전공 남학생도 필요했고,

이사짐 나를 때 무거운 물건 들어줄 머슴 돌쇠도 필요했고... 등등등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냥 순진하고 만만한 남자놈 하나 꼬셔서 데리고 놀았던 것이며

거기에 걸려든 바보같은 놈이 바로 승민 자신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굉장히 악의적인 해석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남자를 꼬셔서 등쳐먹는 예쁜 악녀들이 제법 많다는 현실은

여자들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우~ 썅년! 그런 썅년은 줘도 안 가져"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나쁜 년이 조금 잘해준다고 홀딱 넘어가서 이용만 당한 자신이 바보같고 저주스러워질 것이고

마치 여우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 것이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썅년!'
그런 상황에서 쌍년 정도는 오히려 점잖은 편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보다 더한 욕도 서슴지 않을걸?

 

설상가상으로 그 여우같은 년이 뭔가 더 빨아먹을 것이 남았는지

승민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자꾸 연락해 오면서

아예 공대 앞에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까지 하고 있다.

 

 

승민아... 너 왜 내 연락을 피하니...

 

어떤 남자라도 이렇게 생각할 거다.

아직도 나에게서 더 빨아먹을 단물이 남아 있니?
내가 계속 바보처럼 네 장단에 놀아날 줄 아니?

나는 이제 네 속셈을 다 안다,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을 거다.

'더 이상 나한테 연락하지마. 이제 좀 꺼져줄래?'

라는 험한 소리는 그래서 튀어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런 과정을 굳이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지만,

영화에서는 승민의 사고과정이 대폭 축약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남자라도 이러한 비약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고,

남자 심리에 익숙하지 않은 여자들은 

저 남자애가 도대체 왜 갑자기 저러는지 어리둥절하기 쉽다. 

 

거기에 더해서 종강날 밤의 사건을 무조건 승민의 잘못이라고 해석하는 1차적인 오류에 빠져 버리면 

'꺼져줄래?'라고 모질게 내뱉기까지 승민의 생각이 비약하는 과정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해져 버린다.

사랑하는 여자가 성폭행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면서 왜 도리어 불쌍한 여자에게 욕하는 거야? 라는

수많은 잘못된 리뷰와 해석들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이다.

 

승민이 서연에게 꺼져줄래?라고 모질게 대하는 그 장면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 서연이 강남선배와 잤다(고 오해하)는 이유만으로

옹졸하게 화를 내며 서연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의 진정한 내용은,

서연의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강남선배라고 단정(오해)해 버린 승민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좋아하는 척하며 남자를 가지고 놀았던 악녀에게

나도 이제는 네 속셈을 알아버렸다, 더 이상 바보 노릇 하지 않겠다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나 분노하고 있어.....

 

승민은 그러고서 15년간 서연을 원망하면서 지내왔던 거다.

승민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불쌍한 서연를 욕했던 것이 아니다.

승민은 자신이 오해를 했다거나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15년 후에 서연이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라고 외칠때까지 말이다.

 

오히려, 강남선배를 좋아해서 몸까지 넘어가 버린 주제에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베풀어 자신을 농락했던,

얼굴은 '졸라 이쁘'지만 마음은 속물이고 못되어 먹은 '썅년'으로 서연을 간주했던 거다.

그래서 재회 이후 초반에는 그렇게 서연에게 틱틱거리면서 못마땅해 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고.

 

 

나는 니가 밉거든? 근데 왜 15년만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친했던 척 하는거니?

 

이런 승민의 행동은 잘한 행동도 물론 아니고 오해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최소한 터무니없거나, 앞뒤가 맞지 않거나, 단순히 찌질하고 옹졸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은 아니다.

여우같은 썅년에게 농락당했다고 오해해버린 젊은 남자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만한 개연성 있는 행동인 것이다.

 

승민의 행동은 종강날 밤에 선배를 제지하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서 
'썅년'과 '꺼져줄래' 까지 아주 개연성있게 진행된다.
승민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면 최소한 남자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 하나도 없다.
 

 

'썅년'이라는 욕지거리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여자들이 써놓은 건축학개론에 대한 인터넷 리뷰들을 읽어보면,

승민이 서연을 썅년이라고 욕하는데 충격을 받고

'내가 사랑을 거절했던 그놈(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썅년이라고 욕하고 있을거 아닌가?'

라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영화에 대한 트윗들 가운데 최대의 히트작이

'우리(여자)들은 모두 누군가의 썅년이었다'라는 재미있는 사실도

여자들의 그런 우려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여성분들은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혼자서 사랑의 감정을 키우다가 고백했는데,

여자가 그 감정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전부 다 썅년 취급받는 것은 아니다.

남자입장에서는 부끄럽기야 하겠지만 내 사랑을 거절했다고 무조건 상대를 욕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쪽팔리고 아쉬울 뿐이지.

 

남자가 여자를 썅년이라고 욕하는 때는,

영화 속 사건처럼 여자가 남자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든 이 여자도 나를 좋아한다고 남자가 착각해서 고백했는데 

여자가 그걸 남자 혼자만의 뻘짓으로 만들고 자존심에 상처주면서 거절해야

남자로부터 썅년이라는 욕을 얻어먹게 되는 거다.

여자가 고의로 남자의 그런 착각을 유발했을 수도 있고 (이건 여자가 진짜로 썅년인 경우) 

정말로 남자 혼자 오버해서 착각한 것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런 경우 대개 남자들은 자기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자를 욕하곤 한다)

 

남자의 사랑을 거절했다고 해서 무조건 썅년 되는 거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