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2주차: 건축학개론의 오해 (1) - 문제의 그 종강날 밤

1andau 2012. 5. 21. 15:06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승민과 서연 사이에 결정적인 오해가 생겨났던 문제의 그 종강날 밤 사건을 해석하면서

승민의 행동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잔뜩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승민이 정말로 서연을 사랑했다면 저 장면에서 뛰어나가 강남선배를 막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위와 같은 생각에 바탕해서,

승민은 자기 여자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비겁한 놈, 찌질한 놈, 옹졸한 놈, 겁쟁이, 못난 놈 등등등...

남자가 여자에게 들을 수 있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얻어 먹고 있다.

 

나는 승민의 행동에 대한 이런 해석과 비난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래에 설명하듯이

그날밤 승민은 강남선배를 제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아예 제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에 대한 여러 리뷰들을 읽다 보면, 

대체로 여자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남자들 중에도 종종 같은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종강날 밤의 그 사건 때 승민이 강남선배를 제지하지 않은 이유는,

세간에 흔히 돌아다니는 잘못된 리뷰들과는 달리,

승민이 비겁했거나, 찌질했거나, 겁을 먹었거나, 열등감에 빠졌거나,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 하자면,

승민이 그날밤 선배를 말리고 서연을 구하지 않은 이유는,

서연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강남선배에게 넘어가 버렸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승민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서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승민이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영화를 잘못 해석하고,

그러니까 승민은 나서서 강남선배를 제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승민은 서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헛갈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종강날 밤까지도 자신에 대한 서연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이렇게 승민이 서연의 사랑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전제하는

잘못된 영화읽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원인은 '전지적 관객 시점의 오류'이다. 

관객들은 전지적 시점에 있으므로 서연이 승민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승민의 시점에서는 서연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부 남자관객들이 승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이런 전지적 관객 시점의 오류 때문이다.

 

두번째 원인은 주로 여성 관객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승민과 서연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여자(서연)의 입장에서만 보면서,

서연이 승민에게 좋아한다는 신호를 은근하지만 그만큼 많이 보냈으니까

당연히 승민도 서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리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여자들 중에는 승민이 서연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렇게 눈치가 둔하냐며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1) 기차길 놀이 하면서 손목 잡혀줘,

 

 

 

2) 깨어있으면서도 자는 척 하며 입술 뺐겨줘,

 

 

 

3)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이사하자마자 첫손님으로 초대해줘,

 

 

 

4) 머뭇거리는 남자 녀석 답답해서 첫눈 오는 날 약속 잡아줘,

 

그만큼 눈치를 줬으면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 차려야지,

여자가 도대체 무슨 신호를 얼마나 더 보내야 남자라는 종자들은 알아먹느냐는 거다.

 

그렇지만, 남자인 승민의 입장에서 보면,

서연으로 부터 오는 긍정적인 신호 못지않게,

서연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강남선배이고

승민은 그냥 친구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정적인 신호도 그만큼 많았다.

 

 

 

1) 빈집에서 서연 자신은 강남선배를 좋아하고 그래서 건축학개론을 듣는다는 발언. '왜? 그럼 안돼?'

 

 

 

2) 야외에 나갔을 때,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갈거라는 희망. (승민에게 '너는 아니다'로 들리기 쉽다.)

 

 

 

3) 강남 선배가 '승민이랑 잘 해보라'고 이죽거리니까 '아니예요! 무슨~ 말도 안돼'라고 부정하는 장면

 

 

 

4) 강남 선배가 '술 사줄테니 내 집으로 와라'고 유혹할 때 좋아라 하면서 응할 것처럼 행동하는 장면

 

등등등....

 

승민의 입장에 서 있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서연이 진짜 사랑하는 대상이 승민 자신인지 강남선배인지 헛갈리게 되어 있다.

여기에 강남선배가 키 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훈남이라는 열등감까지 겹치면

아직 자아가 연약한 스무살 남자는 서연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그 종강날 밤 사건이 있었을 때 승민의 심정은,

자신을 향한 서연의 사랑을 확신하며 고백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서연의 사랑이 강남선배가 아닌 승민 자신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불안정한 상태였던 거다.

소주 퍼마시고 못 피우는 담배 빨아가며 긴장을 늦추고자 애쓰면서...

 

그렇게 불안해 하고 있던 승민의 눈 앞에,

공교롭게도 바로 그 강남선배가 술 취한 서연을 바래다 주면서 

방으로 안고 들어가는 장면이 따악~! 펼쳐지고 만다

 

 

 

이럴 때 남자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저 자식이 술먹여 내 여자를 성폭행하려 하니 나가서 막아야 한다'가 아니다. 절대로.

반대로 승민 입장에 있는 남자들이 연상하게 되는 생각은 이거다.

'역시나 걱정했던대로 서연이는 강남선배를 좋아하는 거였어.

마음은 벌써 넘어갔고, 이제는 술에 취해 몸까지 넘어가는 단계로 진전되어 버렸구나.'

 

어떤 여자(이 경우는 서연)가 어떤 남자(이 경우는 강남선배)에게 평소에 호감을 보였는데

그 여자가 술에 취해 그 남자에게 부축받거나 업혀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면

승민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남자들은 대부분

여자가 술김에 (평소의 내숭을 벗어던지고) 그 남자의 품에 가서 안긴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일단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어. 취하면 업어. 침대에 눕혀. 끝!

 

많은 수의 여자들과 일부 남자들은 강남선배의 저 대사만 듣고서  

재욱을 무슨 파렴치 성폭행범 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저 대사는 술먹여 여자를 기절시키고 강간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강남선배가 지껄이는 이야기는,

자기처럼 여성들에게 동경을 받는 멋진 남자가 여자에게 같이 자자고 접근할 때, 

평소라면 조심성 때문에 여자들이 주저하겠지만 

술을 먹여 경계심이 풀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안겨 온다는 자기 자랑이다.

이렇게 시시콜콜 해설하지 않아도

남자들은 대부분 선배의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단번에 알아듣는다.

 

그런데 여자들은 저걸 술먹여 성폭행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종강날 밤 술취해 강남선배에게 안겨있는 서연을 똑같이 보면서도,

많은 여성들은 그걸 성폭행의 위험에 빠진 가련한 여대생으로 해석하는데 반해

남자들은 서연이 강남선배를 사랑하기 때문에 술김에 그 품에 안겼다고 생각하는 

해석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 관객들은 승민의 그런 생각이 오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전지적인 관객의 시점에 있지 않고 승민의 처지에 있었다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자신들도 똑같은 오해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남자관객들은 승민의 오해와 그 후에 이어지는 행동을 아주 개연성있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연이 선배의 키스를 거부하는 장면이 있지 않느냐'라고 반론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이 부분 편집이 약간 애매해서 혼동하기 쉽기는 하다),

승민은 선배가 키스를 시도할 때 차마 그 장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수그려 버렸고

서연이 선배를 두 번이나 거부한 다음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강날 밤의 그 사건은,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는 달리,

강남선배가 술먹여 서연을 겁탈하려 하는데

승민이란 못난 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나서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가 강간당하도록 무책임하게 내버려 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안 그래도 서연이 좋아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강남선배일까봐 고민이었는데,

바로 눈 앞에서 강남선배에게 안겨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서연의 사랑은 강남선배임을 확실히 알아 버렸고 (...라고 오해했고),

여자가 스스로 좋아서 다른 남자에게 안긴다는데

'그냥 친구'일 뿐인 승민으로서는 그걸 뛰어나가 방해하거나 제지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 상황에서 강남선배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종류 뿐이다.

여자의 가족(아버지, 남편, 오빠, 남동생...)이거나 아니면 공인된 애인.

당시 승민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용주 감독이 인터뷰에서 승민이 강남선배를 제지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남자친구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간결하게 대답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승민을 위해서 한가지 말해두자면,

만약 서연이 강남선배를 사랑하고 있다고 오해할만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예를 들어 단순히 서연이 동네 양아치들에게 붙잡혀 희롱당하고 있었던 거라면,

승민은 아무리 겁많고 싸움을 못하고 찌질하고 빌빌했더라도 

용기있게 나서서 제지하고 막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리 못난 남자일지라도 그만한 용기는 있다.  

문제는 그렇게 깡패들에게서 여자를 구해주고 사랑을 얻으면

그건 이미 '건축학개론'이 아니라 '맨발의 청춘'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결국 영화 속 '종강날 밤'의 상황은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며 

구체적으로 누군가가 나빴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승민은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뿐이고,

서연은 여자답게 살짝살짝 아닌 척 내숭떨면서 호의를 전달했는데

그만 그 '살짝살짝 아닌 척'이 여러가지 상황과 우연이 겹치면서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거고,

강남선배는 자신의 방식대로 예쁜 여자에게 술먹이고 들이대서 오케이 하면 같이 자려 했던 것 뿐이다.  

 

'종강날 밤 그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에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나의 해석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하며,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시작점이라고 본다.

종강날 밤 승민의 행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영화의 스토리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