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14주차: 개인적인 감상문

1andau 2012. 6. 8. 19:28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내가 여러번 반복해서 내 돈 주고 극장가서 관람했던 영화는 딱 3개 뿐이다.

제일 최근 것은 당연히 10번이나 관람한 '건축학개론'이고,

30대 시절에 그랬던 영화는 4번이나 관람했던 '클래식'이며,

20대 시절에 그랬던 영화는 3번 반복 감상했던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이다.

(양다리 걸치느라 이 여자와도 함께 보고 저 여자와도 함께 보는 바람에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보게 되었던 영화는 제외하자. -_-;;;;

안 본 척하느라 진땀났던 기억은 남아 있지만 정작 그 영화가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내가 첫사랑에 빠져 있던 당시에는 아카데미상까지 획득하면서 상당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내가 이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는,

첫사랑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봤던 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가 당시 내 첫사랑의 문제처럼 연인간의 어긋나는 이해와 의사소통을 주제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내 첫사랑 그녀가 여주인공 말리 매틀린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여주인공 말리 매틀린. '작은 신의 아이들'로 198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역설적인 상황이었지만, 나는 첫사랑 그녀와 이 영화를 보고 이별한 후에

그녀를 닮은 여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러 혼자서 2번이나 더 극장에 갔던 거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라면 여러번 극장에서 반복 관람하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겼다.

 

'클래식'은 단순히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러번 보러 갔던 것 뿐이지만,

'건축학개론'을 반복해서 보게된 이유도 첫사랑 그녀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내가 극장에서 반복관람했던 영화 3편 가운데 2편이 결국 첫사랑과 관련있는 셈이다.

내가 그 아이를 정말로 좋아했었나 보다.

 

 

여보! 정신차려!     ....으..응?!

 

건축학개론은 반드시 혼자 봐야한다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여럿이어서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몰래 혼자서 보러 갔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별로 없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조금 멍~ 때리기는 했지만,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들어오는 길에 수퍼에서 우유 하나만 사다 달라고.

계속 영화 생각만 하며 집으로 와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유 사오는 것을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여보, 미안. 지금 바로 다시 나가서 우유 사올께.

부인: (찌릿~) 가는 김에 두부도 한 모 사다줘.

 

수퍼에 가는 길에 담배를 피우는데 계속 영화 장면들이 머리에 늘어붙으며 떠나지를 않는다.

어쨌거나 수퍼에 가서 물건을 산 후,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나: 다시 왔어. 여기 우유!

부인: 두부는?

나: 헉! 아차....

부인: (의심스럽게 나를 살펴본다) 당신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뜨끔~) 아냐. 무슨 일 있기는... 수퍼에 다시 다녀올께 *후다다닥*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충격이 상당했었나 보다.

 

 

아니, 쟤가 요새 갑자기 왜 저래?

 

다음날 출근해서도 머리속에 영화의 장면장면들이 맴돌고

첫사랑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자꾸 연상되어 괴로워 하다가,

며칠 후 4월 2일이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난지 정확히 25년째 되는 날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래서 나 혼자만이라도 기념삼아 4월 2일에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건축학개론을 두 번째 보러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보면 식상해져서 처음의 그 묘한 느낌이 없어질거라고 기대했건만,

반대로 두 번째 보고나서는 결국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영화에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던 거다

.

 

내 옆자리에도 30살쯤 되어보이는 어떤 여자가 혼자 자리 잡고 영화를 관람했는데

영화 끝나고 봤더니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될 정도로 울고 있었다.

아무 관련없이 나란히 울고 앉아있는 두 사람을 제 3자가 옆에서 봤다면 정말 웃겼을 거다.

 

 

요새 무슨 일 있어? 일 안 할거야? ................네?네! 합니다.

 

그렇게 영화에 중독되어 버리고난 다음에는 아예 포기해 버리고 땡길 때마다 보러 갔다.

건축학개론은 참 희한한 영화다.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오는 장면이 다르고,

볼수록 비어 있던 여백이 하나씩 채워지면서 스토리가 점점 더 치밀해 진다. 

10번이나 보고난 다음, 영화가 극장에서 내리고 나서야 영화 보기를 그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일하는 짬짬이 시간이 생길 때마다

건축학개론과 관련된 인터넷 기사나 평론이나 블로그 등을 계속 찾아 읽었다.

아마 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단순히 영화만 보고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난 후의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 때문에

열심히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지다가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실테니

영화만 반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글들까지 찾아 읽는

내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나는 왜 이 영화를 자꾸 반복해서 관람하며 관련된 글들을 계속 찾아 읽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은 어떤 여자분이 써놓은 감상문을 읽고 나서였다.

그 감상문을 읽으면서 이상했던 점은 영화를 봤을 때처럼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라는 사실이다.영화도 아니고 감상문을 읽으면서 울다니? 내가 미쳐가고 있는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감상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깨달았다.
나의 이상한 행동들은 모두 어떤 죄책감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읽고서 눈물을 쏟았던 그 건축학개론 감상문은 보기 드물게도과거의 서연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어느 젊은 여자분이 쓰신 것이었다.(일전에 인용했던 '난생 처음 서로 온맘다해 사랑해야 첫사랑'이라는 정의도 원래 이 분 말씀이다.)그 분도 영화 속의 서연처럼 첫사랑 상대에게 아프게 이별을 통고받았는데처음에는 며칠씩 밥조차 먹지 못하고 울면서 상대방을 원망했지만,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자신의 첫사랑과 헤어지던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니매몰차게 떠난 남자에게도 승민처럼 뼈저린 이별의 슬픔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도 첫사랑 그녀에게 잔인하게 상처주면서 내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했었다.그러고는 마음 한 구석에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오랜 세월 동안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건축학개론을 보면서 내가 괴로워했던 이유는 그런 미안함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고,저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던 이유는 글쓴이처럼 내 첫사랑 그녀 또한 남자인 나도 아파했고 슬퍼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리라내멋대로 상상하면서 마치 그녀로부터 용서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 듯 하다.

 

현실에서 첫사랑 그녀가 술먹고 나를 개새끼라고 욕했는지아니면 정말 내 상상대로 나도 그녀만큼이나 아프고 힘들었음을 알아주었는지 이제와서는 알 길이 없다.냉정하게 이별해 버린 원망스러운 첫사랑이었지만남자도 그만큼 슬퍼했음을 알아주는 여자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나는 뭔가 용서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 울음이 나왔던 거다.(옛말에 맞은 놈은 두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무서워서 밤잠 못잔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다.)

 

첫 눈 오는 날 빈집에서 서연이 승민을 기다리는 장면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아마 마찬가지였던 이유였던 것 같다. 승민에게 모진 소리 듣고도 서연이 승민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뻔뻔한 바램이지만) 내 첫사랑도 나를 용서해 주고 기억해 주기를 바랬던 거다.

 

 

사내 자식이 질질 짜기는....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나는 극장에서 울지 않고 담담히 건축학개론을 볼 수 있었다.그래도 9번째 볼 때는 또 다시 뭔가 울컥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만.... T_T

 

이용주 감독은 자신이 만든 건축학개론의 의미에 대해서 "<건축학개론>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중략)...  (여자와) 헤어지는 형식에 대한 비겁함이랄까.......(중략)...  그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내 경우에는 그런 의미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첫사랑 그녀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 과거의 내 행동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됐으니까. "그래두 언니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영화 속 은채에 대한 어느 여성 블로거의 평. '역시 여자들은 촉(觸)이 좋아....'

 

내가 건축학개론의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아내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부인: 여보, 당신도 첫사랑 있었지?나: (뜨끔!) 첫사랑 없는 사람도 있나?부인: 당신 첫사랑은 누구였는데?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뭔가 눈치를 챘나? 아님 나처럼 혼자 건축학개론 보고 왔나?) 그냥 뭐...부인: 그러지 말고 말해봐. 누구였는데?

 

그냥 솔직하게 사실대로 다 이야기했다. 단, 감정은 싸악~ 빼고 건조한 팩트들만.다행히도(?) 내 첫사랑 그녀에게 질투심이나 경쟁의식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던 듯아내는 '별거 아니네'라면서 가볍게 넘어갔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육감이 발달한거야? --;;

 

 

아빠, 들어가 계세요. 추워.

 

건축학개론의 느낌과 관련해서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묘사가 하나 있다.이 영화는 화창한 봄날의 싱그러움과 잘 어울린다는 상투적인 찬사다.화창한 봄날 같은 소리 하고 있네.영화를 보면, 건축학개론의 계절적인 배경은 초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과거 현재 모두 시작은 초가을 밝은 햇살을 배경으로 하지만 끝날 무렵에는 모든 것이 퇴색하는 살풍경한 초겨울로 계절이 바뀐다.그래서 이 영화는 봄날씨에 그리 잘 어울리는 영화가 아니다. 더구나 과거 현재 모두 새드 엔딩 아닌가?이상 기후 탓인지 올봄에는 날씨가 굉장히 썰렁하고 꿀꿀했었는데,봄답지 않게 썰렁했던 개봉 당시의 날씨가 영화의 분위기가 의외로 잘 어울려서흥행에 제법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도 나는 열린 창가에서 회색으로 낮게 드리운 도회의 하늘을 바라보면까닭없이 마음이 설레이는 수가 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이 그런 오월의 창가에서 였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인용

 

날씨는 연상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축학개론을 처음 봤던 날은 봄날답지 않게 을씨년스럽고 비가 내리는 날씨였는데그 날씨가 첫사랑 그녀와 이별하던 날 비가 많이 내렸던 것을 그대로 연상시켜서영화를 보고 난 내 감정의 흔들림을 더 부채질 했던 것 같다.비에 젖어 어깨심이 또렷이 드러나 보이던 그날 그녀의 모습은 왜 이렇게도 잊혀지지 않는 건지.

 

반면에 두번째로 영화를 봤던 날, 그러니까 그녀를 처음 만난지 꼭 25년째 되던 날은하필이면 우리의 첫만남이 있었던 그날처럼 눈부시게 화창하고 봄기운이 막 피어오르는 날씨여서또 한번 감정의 폭풍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아흐... 추워....

 

여기 14주차까지 재수강 블로그를 읽어 오신 분들 가운데는

'이 사람은 왜 기억의 습작 OST 이야기를 전혀 안 하는 거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건축학개론에 관한 인터넷 리뷰들을 찾아 읽어보면

아무리 짧은 리뷰라도 3개에 하나 꼴로 '기억의 습작' OST에 대한 칭찬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내 블로그에는 건축학개론 관련 글이 무려 14개째 올라 가는데도

기억의 습작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기억의 습작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습작이 나왔던 94년 쯤에는 이미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전람회'라는 그룹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히트곡인 기억의 습작이나 취중진담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나는 기억의 습작이라는 곡을 건축학개론에서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주제나 분위기에는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 노래 때문에 영화의 감동이 더 커지거나

누구처럼 기억의 습작이 나오는 순간 감정의 봇물이 터졌던 경험 같은 것은 없다.

 

사운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건축학개론은 훌륭한 스토리와 예쁜 영상에 비해서 음향이 너무 빈약한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녹음이 부실한건지 배우들의 발성이 나쁜건지

예를 들면 수지의 '전람회'라는 대사가 '졸라맨'으로 들렸다는 사람도 여럿 있고,

나도 엄태웅과 납득이의 빠른 대사는 무슨 말인지 반복해서 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감독이 허진호 영화 스타일을 좋아한다니까 취향 차이겠지만

'클래식'처럼 멜로영화에서는 애절한 배경음악이 좌~~악 깔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의 음악이 그다지 강렬하지 않은게 몹시 아쉽다.

배경음악만 조금 더 막강했으면 감동도 배가되고 관객도 100만명은 더 모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건축학개론을 보면 내가 나이를 먹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마음은 아직도 이제훈인데,

 

 

 

내 현실은 김의성(건축학개론 과목 담당교수 역할을 맡은 배우)이다. -_-;;;;

 

젊었을 때는 여자 후배들에게 빈 말로

'내가 첫사랑에 실패하지만 않았으면 너네만한 딸이 있었을 거다'라고 농담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진짜로 '첫사랑에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수지만한 딸이 있었을 나이'가 되어버렸다.

내 첫사랑이 87년이었으니까 정말 첫사랑이 잘 되었더라면

문자 그대로 94년생 수지만한 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교수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도 오랜동안 공부하고 임용을 기다리느라 결혼이 매우 늦었다.

수년 전에야 겨우 결혼해서 이제 돌을 바라보는 아들이 하나 있을 뿐이다.

몇 주 전 주말에 모처럼 아이를 돌보면서 아들에게 갑자기 이렇게 물어 봤다.

아들아, 너도 자라서 때가 되면 예쁜 소녀와 잊지 못할 첫사랑을 하게 되겠지? 라고.

아직 아빠 엄마 밖에 말할 줄 모르는 녀석이 뭔가 알아들었는지, 좋아라하면서 해맑게 웃는다. ^_^;;

내 아들에게도 아버지처럼 진정한 의미로서의 첫사랑이 있기를 바란다.

내 첫사랑 그녀처럼 예쁘고 고운 소녀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