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16주차 (기말고사):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이 좋을까?

1andau 2012. 6. 14. 02:06

 

 

(주의사항: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읽지 마십시요.)

 

기말고사 문제: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만나는 것이 좋을까?

 

단답형 모범답안: 아니요.

 

서술형 모범답안: 이하 주저리 주저리

 

이번 기말고사 문제는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아주 쉬운 문제에 속한다.

첫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헤어진 첫사랑이나 옛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나 조언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니까.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말라는 조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기억 속에 미화되었던 첫사랑 그녀 또는 그놈(?)의 환상이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났을 때의 실망 때문에 깨져 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첫사랑을 다시 만나 본 경험이 없지만 아마 맞는 말일 거다.

 

 

누구...세요?

 

30대 중반의 어느 여배우를 촬영한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물론 연예인이니까 예쁘고 눈길도 가고 하겠지만,

이 사진을 보고 첫사랑 그녀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울렁거림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사진 속의 이 인물이 누군가 하면.... (아래의 '더보기'를 클릭하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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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러브레터'에서 첫사랑의 소녀 역할을 맡았던 사카이 미키다.

1978년생이어서 러브레터가 개봉됐던 95년에 17살이었고 지금은 34살이란다.

사카이 미키의 최근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러브레터에서 수많은 남자관객들의 가슴을 설래게 만들었던 반짝반짝 빛나던 그 무언가는 

이미 사라져 버려 찾을 길이 없는 것 같다.

 

 

 

어느 남자에게나 첫사랑 그녀는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첫사랑을 말아먹고 몇년 지난 다음의 어느 날, 여자 후배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후배: 오빠도 첫사랑 있으셨죠?

나: 당근 있었지!

후배: 예뻤어요?

나: 겁나게 예뻤지!

후배: 헉.... 얼마나 예뻤길래... +_+

 

러브레터의 사카이 미키 또한 저토록 아름다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삭아서 실망스런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고

그런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옛사랑은

절대 그 시절과 똑같은 느낌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건축학개론에 대한 여러 감상문 가운데 코믹했던 것 한가지는,

93학번이었다는 어느 아줌마가 자기 젊었을 때를 추억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 당시 나를 좋아해줬던 남자애들에게 못 되게 굴어서 정말 미안하다. 너그럽게 용서해주라.

그 벌을 받은건지 나는 지금 완전히 뚱땡이 아줌마가 되어버렸단다. T_T"

 

 

오른쪽 같던 첫사랑 그녀가 왼쪽처럼 변했을 수도 있다는 이 무셔븐 현실. -_-;;;

 

비슷한 맥락의 또다른 감상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아마 20대 후반쯤의 여자였던 것 같다. 

"건축학개론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시절 친했던 남자애들 몇명을 다시 만나 봤다.

니네들 도대체 왜 이렇게 삭은거니? 그 당시에는 그래도 다들 나름 훈남들이었잖니?"

 

만약 내 첫사랑이 오늘날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유추할만한 경험이 있다.

결혼 하고나서 얼마 후에 아내가 내 앨범을 보여달라기에 대학시절 사진들을 보여줬더니

"여기 이 피부 쌩쌩하고 팔팔해 보이는 청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거야? 응?

여보, 그 시절로 돌아가 주면 안 될까?" 라면서 20년 사이에 왜 이렇게 변했냐는 것이었다.

(빈말로라도 잘 생겼었다거나 매력적이었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하더만.... -_-;;;)

 

 

난 별로 변한 것도 없는데?  에이.... 우리도 이젠 늙었지!

 

내 첫사랑 그녀도 아마 마찬가지겠지. 틀림없이 둘 다 실망할거다.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은가와 유사한 문제로

"스무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건축학개론을 보고서 어떤 남자가 스무살 그 시절에 대해 쓴 감상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전략)...  한없이 작아지는 열등감을 어쩌지 못해

 극단적인 자기비하와 말도 안 되는 과잉행동의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중략)... 그래서 저는 절대로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무엇보다 그 불안감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후략)..."

 

또 다른 어느 중년 남성도 같은 생각인가 보다.

"모든 것이 빛이 나고 아름다운 시절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불안한 것이 청춘입니다.

대학을 어디를 가야하고, 전공을 무엇을 택하고,

황금같은 대학교 1,2학년 시절에 군대는 언제 가야할지 고민하고, 

그렇게 군대를 다녀오면 이제는 앞으로의 삶에대한 불안한 미래가 또 펼쳐져있고,

입사지원을 하고 회사를 택하고, 그리고 과연 나도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소개팅을 하고...

그 과정들이 곧 청춘이고, 삶이고, 인생이겠지만,

그런 과정들은 그냥 제 인생에 한번으로 족하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모든게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만 ....(중략)...

다시 무슨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고싶지 않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한창 건축학개론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을 무렵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아내: 당신, 돌아갈 수 있다면 20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나: (이 사람 요새 왜 이래? 진짜로 뭔가 눈치를 챘나?) 몬 소리야 그게? <--- 영화 속 납득이의 대사

아내: 전에 봤던 사진처럼 파릇파릇한 20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그냥 궁금해서.

나: 난 싫어!

아내: (눈을 똥그랗게 뜨고 *_*) 왜애~?

나: 젊기만 하면 뭐해. 사방에 최루탄 날아다니고, 학생들은 줄줄이 죽어나가고,

     그런 와중에서 갈등하면서 공부를 제대로 했던 것도 아니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만 잔뜩 짊어진 채로 

     20대를 통째로 대학원에서 썩으면서도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던....

     그 고생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이 훨씬 좋아.

아내: (갸우뚱) 그으래~?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좋듯이,

스무살 그 시절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

 

이번 기말고사의 모범답안은 딱 여기까지다.

하지만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다 보면,

때때로 100점 만점에 120점을 주고 싶은 독창적인 관점의 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에는 내 나름대로의 답안을 적어 놓는다.  

 

그래도 나는 첫사랑 그녀를 다시 한번만 더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첫사랑을 다시 만났을 때 삭아버린 얼굴에 실망하는 이유는

다시 만나는 첫사랑에게 울렁거리던 예전의 그 감정을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거다.

그런 기대를 접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라고 내멋대로 생각해 본다.

내가 지금보다 10년만 젊었더라면 어떤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처럼 15년도 아니고 25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만난 설레임'에 대한 기대 따위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뚱땡이 아줌마가 됐건 피부가 삭아버렸건

내가 머리가 벗겨졌건 배가 나왔건 별로 상관이 없고, 실망할 일도 없을 거다.

 

내가 첫사랑 그녀를 다시 만나고픈 이유는,

첫사랑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나를 건축학개론에 그토록 몰입하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던

이별하던 날의 내 잔인했던 행동에 대해 그녀에게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다.

나의 유치했던 짓거리가 그녀의 고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속의 승민과 서연이 진심으로 부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15년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 미완의 첫사랑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그들처럼 못 다했던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중곡동 사진

 

얼마전에 때마침 세종대에 갈 일이 생겨서 내친 김에 내 첫사랑의 무대였던 중곡동에도 잠시 가 봤다.

만날 때마다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 주면서 함께 걷던 곳을 둘러보니,

그녀와 함께 했던 대학 1학년 시절이 문자 그대로 내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가장 빛나던 시절에 우연히 그녀와 함께 했던 것이 아니고,

첫사랑 그녀가 나와 함께 해주었기 때문에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 되었다

는 것을.

그래서 다시 만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졌다. 

내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라고, 나의 헛된 아집 때문에 너를 아프게 했지만그래도 나는 진정으로 너를 좋아했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