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강하는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재수강 온라인 종강 뒷풀이: 나의 첫사랑 이야기

1andau 2012. 6. 15. 18:58

 

(이 글은 영화 건축학개론에 대한 리뷰가 아니고 저의 개인적인 추억담입니다.

건축학개론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으므로 영화에만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재수강 강의록과는 달리 영화 장면 캡춰 사진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영화 속의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종강날 뒷풀이 술자리가 없었다면

서연과 승민의 그 가슴 아픈 오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담당하는 XX학개론 과목에서는 종강날 뒷풀이 술자리가 열렸던 적이 없지만,

건축학개론 재수강 강의록 한학기 분량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온라인으로나마 종강 뒷풀이 술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고픈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런 뒷풀이 자리를 따로 만들게 된 이유는, 

이곳에서만이라도 내 첫사랑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건축학개론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에는 자기 첫사랑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고 한다.

나도 재수강 강의를 하면서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할까 말까 여러번 망설였는데

결국 강의록은 영화를 위한 것이니까 영화에 관한 글들로만 한정짓고,

내 첫사랑 이야기는 따로 이렇게 뒷풀이에서 술취한(?) 채로 주절거리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공개할지 말지 오랜동안 망설였다.

일단 비공개로 설정해 놓고,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공개할 작정이었는데,

오늘이 첫사랑을 그녀를 만난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라서기념삼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글의 내용이 너무 개인적이더라도

종강날 뒷풀이 술자리에서 취한 채로 오고가는 첫사랑 타령 정도로 생각해 주시고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1> 첫만남

 

내가 영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초봄의 어느 미팅 자리에서 였다.

(영미라는 이름은 실명이다. 처음에는 가명으로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대한민국에 영미라는 이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나 싶어 

그냥 실명으로 쓰기로 했다.)

나로서는 대학 들어가고 나서 겨우 두번째 하게 되었던 미팅자리였다.

 

남자와 여자가 여러명 단체로 만나 함께 어울려 놀고 나서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주선자를 통해 다시 연락을 취하는 

오늘날의 미팅 방식과는 달리,

80년대 당시의 미팅은 무조건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1명씩 파트너로 짝지어 주고 커플끼리 이야기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맘에 들어해도 파트너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어서

미팅에서 인연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미팅 나갈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는 조언들이 많았다. 미팅 나가서 쟤가 맘에 든다 하면 

절대로 자신의 파트너가 되지 않고,  

쟤만 아니면 다 좋다고 생각할 때는 반드시 걔가 나의 파트너가 된다는 식으로,

미팅 나가서 애인 생길 확률은 1%도 안된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미팅의 성공률이 낮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처음 미팅 장소에서 상대편 여자애들을 봤을 때부터 

나는 영미가 한눈에 화악~ 들어왔고 진심으로 그녀와 파트너가 되고 싶었다.

한 눈에 쏙 들어오는 참한 그 첫인상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미팅은 

남녀 각각 20명씩 참석 인원이 모두 40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미팅이었으니

산술적으로 따져봐도 우리가 파트너가 될 확률은 기껏해야 5%에 불과했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상대는 절대로 내 파트너가 되지 않는다는 징크스까지 있던 시절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2번이라는 밋밋한 숫자를 뽑았을 때 

영미도 2번을 뽑아서 눈여겨 보았던 그녀가 바로 내 파트너가 되었다는 사실은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5%의 낮은 확률을 이겨내고 파트너가 되어서 우리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입심이 좋은 편이어서

처음 만난 여자를 상대로 뻘쭘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는 거다.

남자들 가운데는 이걸 못해서 소개팅이나 1대1 미팅에 공포감을 갖는 경우가 꽤 있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곤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에 나와 함께 미팅을 나갔던 친구들이

"넌 도대체 처음 만나는 여자랑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니?" 하고 물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다.

물론 그런 장광설을 여자들이 재미있어 하느냐 아니냐는 또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시간쯤 이야기를 해나가다가 

내가 영미에게 용감하게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 했다.

이런 제안은 그 당시 미팅의 관습 가운데 하나였는데,

시끄러운 미팅 장소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옮겨서 둘만 조용히 이야기 하자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는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너도 내가 마음에 드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자리를 옮기자고 했을 때 따라 나오면 그녀도 내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고

그냥 계속 있자고 하면 그날 미팅에서만 서로 성의를 다하고 다시 만날 의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더더욱 놀랍게도 영미가 좋다고 답해서 우리는 함께 미팅 장소를 빠져 나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미팅 장소는 이대 앞의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이라는 큰 카페였는데
그 예쁘던 아이가 자신은 고교때 불어를 공부했다면서 독어의 딱딱한 발음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장미빛 인생"이란 불어 단어의 발음을 들려주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입매는 왜 그리 고왔고, 그녀의 목소리는 왜 그리 예뻤는지. +_+

 

장미빛 인생을 나온 우리는 근처에서 'LEMON'이란 이름이 붙은 작고 오붓한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그냥 두 사람 다 이름이 맘에 들어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아담하고 좋아서 그 뒤로도 우리는 이대 앞에 갈 때마다 레몬을 찾아갔고

영화 속 승민과 서연의 그 빈 집처럼 레몬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레몬에서 우리는 무려 밤 10시까지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때만 해도 요즘처럼 처음 소개받은 당일날 술 먹고, 나이트 가고, 심지어 갈데까지 가는 풍습이 없었다.)

미팅 시작한게 5시고 둘이 따로 나온게 6시였으니 총 5시간, 레몬에만 4시간을 함께 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영미가 어릴 때부터 중곡동에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민학교 시절에 나도 중곡동에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같은 동네에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했던 기억도 나고,

영미의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나 모두 명문대 법대를 졸업했으면서도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고시공부에 올인하지 못하고 

곧바로 취직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두 분 모두 고시에 한맺힌 분들이었다는 공통점을 있어서 

이야기가 아주 잘 통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아버지의 바램에 따라 영미는 법학과에 입학한 고시 지망생이었으며,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공계로 진학해버린 불효자식(?)이란 이야기도 주고 받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만큼 시간이 늦어 우리는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은 남자가 집에 바래다 주는 것을 여자들이 꺼려 한다지만,

87년 당시만 해도 늦은 시간에 파트너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 일은 

미팅에 나온 남자의 기본 매너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옛날에 살던 중곡동에 가보고 싶다고 핑계를 대면서 영미를 바래다 주러 갔었는데,

막상 가봤더니 영미네 집과 어릴 때 내가 살았던 집이 겨우 골목 하나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거리로 치면 50미터도 안 되었기 때문에 둘이 깜짝 놀랐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과거에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으니

영미와 내가 어떤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도 우리에게 오버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다.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소꿉친구였을지도 몰라.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잔뜩 긴장하며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를 물었고,

영미는 고맙게도  나의 애프터 신청을 웃음과 함께 받아 주었다.

그 날은 내가 건축학개론을 두 번째 봤던 날처럼

약간 쌀쌀하면서도 봄기운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화창하게 맑은 초봄날이었다.

영미를 집에 들여보내고 돌아 오면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발이 땅에 닿았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말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행복한 기분이었다. ^_^

 

마음에 드는 상대는 절대 내 파트너가 되지 않는다는 '미팅의 저주'와 5%의 낮은 확률을 이겨냈고,

어릴 때 두 사람이 가까운 이웃에 살았다는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영미와의 인연은 단순한 미팅 파트너가 아닌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우리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니, 건축학개론의 메인 예고편에 나오는 문구를 베껴서 좀 더 멋있게 표현해 보자면

'첫사랑이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왔다'.

 

 

<2> 행복했던 시절

 

처음에 그런 계기로 인연이 시작된 다음부터 여름방학 때까지는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 신입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춘기 내내 남중-남고나 여중-여고를 거치면서 불모의 세월(?)을 보내다가(당시만 해도 남녀공학이 상당히 드물었다)갑자기 눈 앞에 남친/여친이 생겨버렸기 때문인지우리는 반쯤 정신을 못 차리고 열렬하게 첫사랑에 빠져 들었다.

  

당시에 나는 나같은 애가 영미처럼 예쁘고 고운 여학생과 사귄다는 사실조차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강의 중에도 이야기 했듯이, 남자에게 첫사랑 그녀는 아름다움의 표상이다.영미는 적당한 키에 날렵한 몸매였고 얼굴이 하얀데다가 선이 고와서 참한 인상을 주는 예쁜 여학생이었다.건축학개론의 수지만큼 예뻤냐고? 아니, 

수지보다 훨씬 더 예뻤어! (버럭)

 

내 눈에 콩깍지가 씌워 있었기 때문에 영미의 미모가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영미와 만났던 미팅 다음 날, 함께 미팅에 나갔던 친구들끼리 다시 만났을 때,녀석들의 반응은 "아, 그 2번 여자애? 걔 괜찮더라." 정도였을 뿐이니 아마도 여신급의 미모는 아니었나 보다.그러면 어떠랴. 내게는 건축학개론의 수지보다도, 다른 그 어떤 여자아이보다도 영미가 더 예뻐보였는데.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친구가 서연을 보고 "아, 그 정약용? 걔 괜찮던데"라고 30년 전에 내가 친구에게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대사가 나와서 

나는 정말 재미있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 첫사랑의 주요 무대는 신촌과 중곡동과 한양대 앞이었다.중곡동이야 영미네 집이 있던 곳인데다가 만날 때마다 바래다 줬으니까 당연한거고,한양대 앞은 영미네 집에 가기 위해 2호선 지하철에서 내려 542번 버스를 갈아 탔던 곳이기 때문이다.시간이 이르고 뭔가 아쉽다 싶으면 한양대 앞에서 조금 더 함께 놀다가 중곡동으로 향했고,시간이 너무 늦었다 싶으면 한양대 역까지만 바래다 주고 돌아오기도 했으며,잘 모르는 처음 찾아가는 곳을 갈 때는 꼭 먼저 한양대 역에서 

만나 함께 가고는 했었다.

우리는 둘 다 서울이 고향이었지만 지리에 어두운 서울 촌놈들이어서 (그래서 나는 서연이 승민을 서울 촌놈이라고 갈구는 장면에서도 참 많이 웃었다)어디 콘서트 장이라도 한 번 찾아가려면 둘이 함께 잔뜩 긴장하며 길을 찾아가야 했었다.

 

신촌이 주무대가 된 이유는 영미의 학교가 신촌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신촌 일대가 대학생들이 만나기에 가장 좋은 '젊음의 거리'였기 때문이다.

(홍대앞은 그때만 해도 미술하는 사람들만 주로 모이던 마이너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남며가 데이트 할 때 가장 손쉽고 만만한 아이템은 영화구경인데우리의 홈그라운드는 신촌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있던 신영극장에 자주 갔었다.신영극장은 약간 규모가 작고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영화

표를 구하기가 쉬웠으며

영미네 학교에서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단골극장이 되었다.

(신영극장은 후에 아트레온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CGV 신촌이 되었다.)

그 당시 상영했던 '세 남자와 아기바구니'나 '기쁜 우리 젊은날'을 거기서 보고함께 신촌 일대를 누비고 다니면서 밥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교도, 전공도, 출신 고등학교도 모두 달랐으며단지 미팅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우리에게는 

마치 건축학개론의 그 강남선배처럼 양쪽을 모두 잘 아는 제 3자가 있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교내 서클(동아리) 하나에 굉장히 열심히 참여했는데,영미의 여고시절 베스트 프렌드였던 진선이라는 아이가 

바로 그 서클에 가입해 있었던 거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도 둘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신기하게 여겼다.진선이도 당연히 나와 영미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자잘한 조언을 주기도 했었다.
우리는 서로 집과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우리 학교에서 영미네 학교까지는 1시간반 정도나 걸렸다.)캠퍼스 커플처럼 매일매일 함께 하지는 못 했고강의가 일찍 끝나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1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만났다.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게 더 좋았던 것 같다.영미와 헤어진 후 수년 후에 같은 학교 후배와 캠퍼스 커플도 해 본 적이 있는데 내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체질에 맞지 않는 연애 방식이라고 느껴졌다. 지금과 달리 휴대폰이나 삐삐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목소리도 거의 듣지 못하고 1주일에 한두 번 시간을 짜내어 겨우 만나는 정도였지만그 때문에 더 애틋하기도 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기도 했던 것 같다.
4월 초에 처음 만나 점점 친해지면서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아마 그해 5월이었을 것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기도 하고, 

여학생들이 1년 중 가장 화사하게 예뻐지는 때이기도 하고,

입학 초반의 얼떨떨함과 중간고사를 거친 신입생들이 어느 정도 대학생다워지는 때이기도 하고,

대학의 축제 시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대학 축제라는 것이 술 퍼마시는 일 이외에는 별것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는 말로만 듣던 대학축제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어 가슴 설레던 1학년들이었다.

 

여러 학교의 축제를 구경갔었지만 제일 먼저 갔던 연대 축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영미가 그날따라 한껏 멋을 부려 세미정장풍의 어른스러운 옷을 처음 입고 왔는데한창 피어나던 스무살 봄처녀의 아름다움과 어루어져 그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기 때문이다.영미 자신도 스스로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자신은 원숭이띠가 아니라 꽃띠라는 농담까지 했었고,

나 또한 영미가 너무 예뻐보였기 때문에 내내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건축학개론 재수강 강의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듯이, 연대축제를 구경하던 도중에 

나는 연대에서 열리던 어떤 행사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와야할 일이 있었다. 

연대 도서관 앞에 그녀를 앉혀놓고 30분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다음 약속장소로 향했었는데아무리 옛날이었다지만 내가 정말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놈이었던 것 같다.아마 요즘 아가씨들 같았으면 여자 혼자 내버려두고 지 혼자 볼일보러 가다니 

뭐 이런 무례한 놈이 다 있느냐고 

잔뜩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거다.

하지만 영미는 내가 약속시간을 넘겨 거의 1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을 때도연대 도서관 앞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돌아오는 나를 보자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기까지 하면서.그날 나를 기다려주던 영미의 모습은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기억에 너무나 또렷하고, 눈부시게 예쁘고,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내가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영미의 모습이

연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스커트 아래로 예쁜 종아리를 뻗은 채로나를 보고 화사하게 웃어주던 바로 그때 그 모습이다.

 

행복했던 기억이 많지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만큼 창피했던 삽질의 추억도 그만큼 많다.

오죽하면 건축학개론에 남자들이 열광했던 이유에 관한 분석들 가운데'그 시절에 나만 바보짓 했던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해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있었겠는가.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도 영미 앞에서 낯 뜨거운 바보짓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그 삽질들 가운데 정말 어이없는 행동들은 너무 쪽팔려서 술취한(?) 지금도 절대 밝힐 수 없고,그나마 덜 창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실수들 가운데 하나가 역시 대학 축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대학축제 순례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은 5월말의 영미네 학교 축제였다.

영미네 학교는 여자대학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약간 긴장이 되었는데,

내가 부모님들 대학 다니시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만 믿고는 

어이없게도 양복을 쫘-악 빼입고 가는 몰상식한 짓을 저질러 버렸던 거다. 

교문 앞에서 영미가 나를 처음 봤을 때의 표정은 당황한 나머지 기절초풍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영미와 헤어진 이후로도 10년이 넘게 간직했던 사진을 찍었던 것도 그 때였다.건축학개론의 스틸 사진처럼 둘이 나란히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촌스런 양복을 입었음에도 그 사진만큼은 기막히게 잘 나와서보는 사람들마다 너무나 예쁘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칭찬해마지 않았었다.
영미는 내가 양복을 입은 탓에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 처럼 보인다고 투덜댔는데,축제 도중에 우리를 봤던 영미의 친구들도 나를 직장인으로 오해하는 바람에영미가 학생도 아니고 늙은(?) 직장인과 사귄다고 헛소문이 나서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느라 애를 좀 먹었던 모양이다. 이게 그나마 가장 덜 쪽팔린 삽질이었으니 진짜 쪽팔린 삽질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

 

당연히 우리 사이에도 남녀간에 흔히 발생하는 의사소통 문제가 여러번 있었다.

오늘날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백마에 얽힌 해프닝이다.

 

우리는 건축학개론의 승민이나 서연과 달리 교외로 함께 놀러나갔던 적이 한번도 없다.

당연히 나는 영미와 함께 경치좋은 곳에 가보고 싶었고 계절도 때마침 화창한 늦봄이었지만,

내가 어디선가 백마가 커플이 여행가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만 줏어듣고서 

영미에게 별 생각없이 백마에 함께 가자고 청했다가 거절당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함께 교외로 나가보자는 제안을 얘가 왜 싫다는 것인지 어리둥절 했었고

그 뒤로는 교외로 놀러가자는 제안을 하지 못했었다.

한참 나중에야 우리들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일산과 파주까지 대규모로 개발된 오늘날 백마는 그저 그런 카페촌에 불과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백마는 서울에 가까우면서도 교통이 상당히 불편하고 외진 장소였다고 한다.경치와 분위기는 좋지만 저녁 7시만 되면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가 끊겨 버리는 황당한 곳이었다는데,흑심을 품은 남자들이 순진한 여학생을 교외로 나가자고 꼬셔서 백마로 데려간 다음저녁시간까지 적당히 분위기 좀 잡고 있다보면 이미 서울가는 버스가 끊겨버리는 거다.콜택시도 없던 시절이니 여자는 꼼짝없이 백마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야했고그러다보면 

어찌어찌 하면서 연인 사이에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는 걸로 유명한 곳이 

바로 백마였던 것이다.

 

백마가 그런 곳인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억울하다. -_-;;;; 나는 그저 경치좋은 교외에 함께 나가자는 뜻이었을 뿐인데,영미는 백마에 대한 그런 상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음흉한 놈으로 오해했던 거다. 이 또한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인데, 우리가 첫사랑하던 87년에는 이미 백마도 교통편이 많이 좋아져서밤 9시 넘어서까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가 여러대 있었다고 한다.그러니까 백마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던 나도 왕초보였지만,70년대 사정을 87년 당시에도 그대로라고 오해했던 영미도 역시 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원래 초보들끼리의 어설픈 첫사랑은 항상 이런 식으로 서로 오해하기 쉽다.
또 하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일화는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 모처럼 

강남역에서 둘이 만나기로 했던 날에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와서 서울지하철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선로가 침수되었던 사건이다.

하필 침수된 구간이 한양대에서 강남으로 오는 2호선 노선이어서 

약속장소까지 오느라 영미가 굉장히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영미는 약속시간을 2시간이나 넘겨서야 간신히 도착했고,

나는 약속장소에서 2시간이나 혼자 기다리고서야 영미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는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이런 돌발사태가 생기면 서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조차 없는데 무작정 약속장소에서 2시간씩 기다리거나 

이미 2시간이 지난 약속을 지키러 약속장소까지 가는 것은

서로간에 어지간한 신뢰가 있지 않은 이상 아무리 그 시절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영미가 꼭 올거라 믿고 약속장소에서 기약없이 2시간이 넘도록 죽치고 앉아 기다렸던 나도약속시간에 한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불편한 길을 돌아 끝까지 약속장소로 와주었던 영미도둘 다 모두 서로에 대한 마음만은 진실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연인들이었다. 
그 시절에 영미가 내게 보여 주었던 사랑을 되새겨 보면,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느낌 뿐이다.

가족간의 사랑이나 친구들과의 우정과는 또 다르게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 순수한 감정으로 서로에게 애정과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 진실한 감정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3> 첫번째 이별

 

더위와 여름방학이 한창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만 만나자는 소리를 먼저 꺼낸 것은 영미 쪽이었다.건축학개론 재수강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뭐야, 영화 건축학개론처럼 남자인 당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그랬다며? 이야기가 다르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두번째 이별할 때 이야기고 

첫번째 이별할 때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영미였다.

 

나로서는 완전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였다.

물론 첫사랑이다 보니 내가 영미 앞에서 삽질 바보짓을 좀 많이 하기는 했지만 (-_-;;;)

우리는 언쟁이나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한 학기동안 행복하게 잘 지내왔는데 

느닷없이 헤어지자니 이 무슨 날벼락이냐 싶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너 내가 싫어졌니? 아니면 누구 다른 남자 생겼니?'라고 촌스럽게 영미를 다그쳤지만, 

이야기를 들어본즉슨 영미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계기는 건강검진 중에 우연히 영미의 아버님에게서 암이 발견된 일이었다.

그 부위가 갑상선이었고 조기에 발견되어서 전이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었지만

,

아직 스무살 밖에 안 되었던 영미에게는 마치 엄청난 불행이 덮친 것 같은 느낌이었던 모양이다.(영화에서 첫사랑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이유로 암과 백혈병이 으뜸이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서 하필이면 때맞춰 1학기 성적표가 날아들었는데영미의 성적이 부모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할만큼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1학기 성적이 엉망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아무리 대학 1학년 교양과정은 공부에 부담이 적고 놀기 좋은 때라 하더라도 둘 다 첫사랑에 정신이 팔려 그렇게 열을 올려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고,설상가상으로 1987년 그 해 1학기는 6.29 선언이 있었던 정치적 격변기여서대학생들이 저항의 표시로 1학기 기말시험을 단체로 거부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할만큼 다같이 성적이 나빴던 때였다. 
나는 부모님께 꾸지람 한 번 듣고 다음에 잘 하면 되겠지 생각하며 낙천적으로 넘겼지만,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고시에 한맺힌 아버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영미는아버지는 암에 걸리셨는데 딸래미는 연애질로 시간 보내느라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어서였는지우리 관계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그래서 느닷없이 잘 되어가던 첫사랑을 그만두자는 말이 튀어나왔던 거다.
사랑은 모든 난관을 극복한다고 믿는 로맨티스트들은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잘 사귀던 커플이 깨어진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지도 모른다.사실 나도 그랬었다. 그런건 우리가 헤어질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솔직히 지금까지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겨우 그런 이유로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내가 우겼기 때문에

우리는 몇 달밖에 사귀지 않았던 주제에 헤어지는데만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영미가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하고서 돌아가버려도 며칠 뒤에 내가 또 다시 불러내어 설득하는 일이 계속 반복됐기 때문이다.영미도 잘 해오던 첫사랑을 그렇게 단번에 끝내기가 쉽지 않았는지 무척 망설였던 모양이다.납득이에게 상담하는 영화 속의 승민처럼여고시절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진지하게 상담을 구하기도 하면서

우리 관계를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미가 나에게 '너처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아마 다시 못 만날거야'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일은, 그 와중에 느닷없이 내가 영미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됐다는 사실이다.챗바퀴처럼 반복되는 설득에 질려버렸는지 그날은 영미가 아예 만나러 나와주지를 않아서나는 영미네 집 앞까지 찾아가 문 앞에서 잠시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없는지 전화를 걸었는데딸의 남자친구가 집 앞까지 와 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 영미 부모님께서갑자기 나를 한번 보자고 안으로 불러들이신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코미디 영화 못지 않게 정말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었다. 그 때 우리는 헤어지느냐 마느냐로 심각하게 다투고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오히려 나는 영미 부모님 앞에 자세 잡고 앉아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시고?'  '아버님 뭐하시냐?' 같은 질문에 

잔뜩 긴장한 대로 땀까지 뻘뻘 흘리며 답하고 있어야 했던 거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엽기적인 그녀'를 관람할 때 차태현이 한진희(전지현 아버지 역할) 앞에 불려가 쩔쩔 매는 장면에서 정말 많이 웃었다.하지만 영미의 부모님이 엽기적인 그녀의 한진희처럼 나에게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이셨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너무나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해주셨기에 나도 점차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저녁까지(!) 얻어먹게 됐다.
영미네 집 안으로 들어가 봤던 것도 그때가 유일했고, 

영미의 사진 앨범을 구경했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당시에는 친구를 집에 불러 사진을 보여주는 일이 소중한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는데

부모님이 계셔서 그랬는지 영미는 헤어지려는 남친에게 앨범을 보여주는 약간 어색한 행동을 했던 거다.

부모님께 불려가는 바람에 그날은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하고 영미네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친 부모님께 '댁의 따님이 저랑 헤어지겠다고 하니 쫌 말려주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며칠 후에 다시 영미네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미는 뜻밖에도 부모님들이 나를 굉장히 맘에 들어하셨고 잘 사귀어보라는 말씀까지 하셨다면서 

나보고 의외로 보기보다 재주가 좋다(?)며 웃었지만, 

더 이상 나와 만나지 않겠다는 생각만큼은 여전히 확고했다.


한 달이 넘도록 그녀를 설득해 보려고 애쓰던 내 감정도 거기서 그만 무너져 버렸다.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별을 받아들인 것이다.

뒤돌아 떠나가는 나를 문 앞에서 지켜봐 주던 영미가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난생 처음 뭐라 묘사하기 어려운 벅찬 슬픔을 느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영미를 처음 만났던 날과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에서 

발이 땅에 닿았던 기억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 

세상이 무너져 버린 듯한 절망감 때문에 말이다. 

 

나는 영미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나 서글펐고,

내가 난생 처음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으며,

뭔가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가 깨져 버렸다는 현실을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랑이 크면 그만큼 미움도 크다고 했던가? 

내 마음 한구석에 영미에 대한 미움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한달 내내 영미에게 간청하며 매달릴 일이 아니었다.내가 조금 더 노련하고 생각이 깊었다면처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쿨하게 보내주고 

한동안 만나지 않고 냉각기를 가진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청하는게 더 나았을 것이다. 

첫사랑이고 경험이 없으니까 그랬던 거겠지. 

그 정도로 노련하면 그게 선수지 어디 첫사랑인가?

미련하게 이별을 질질 끄는 사이에 연약하던 

스무살의 내 자아는 심각한 상처를 받았고

훗날 그 상처가 쓸데 없는 자존심으로 표출되며 결정적인 

두번째 이별을 불러왔던 거였다.

 

며칠동안 먹지도 못하는 술을 퍼마시며 그녀를 향해 '썅년'을 포함한 갖가지 욕설을 퍼붓고 났더니

어느덧 2학기 개강이 코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우울한 신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4> 재회

 

아무리 그럴듯한 글빨로 미화하고 포장하더라도, 

내가 영미에게 보기좋게 차여버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진부한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당신의 첫사랑이 진실했다는 것은 믿는다 치더라도,

상대방 여자 쪽도 당신만큼 진심이었는지를 어떻게 확신하는가?

아버님 병환이나 성적문제도 그저 당신이 싫어져서 헤어지기 위한 핑계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행복했던 1학기도 당신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고여자 입장에서는 그저 몇달 사귀다가 당신의 바보짓거리에 싫증이 나서 핑계대고 헤어지려고 맘먹었을 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첫사랑으로부터 이별을 선고받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궁금증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게될 거다.

"그(녀)도 나처럼 진심이었을까?"

 

건축학개론에서 첫 눈 오는 날 빈 집 장면이나

서연이 승민에게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라고 외치는 장면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깊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아마 그 장면들이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애태웠던 첫사랑 상대의 진심이 

직설적으로 속시원히 드러나는 대리만족을 관객들에게 주었기 때문일 거다. 

 

첫번째 이별에서 그냥 끝나 버렸더라면 

아마 나도 영화 속의 승민처럼 오늘날까지 영미를 '썅년'이라고 욕하면서

영미도 나만큼 진심이었는지 영영 확신하지 못했을 거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의 진심을 궁금해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왜냐하면 이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미가 나를 다시 찾아와서, 

나에 대한 영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간격이 15년이냐 불과 2달이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건축학개론처럼 나도 상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첫사랑 제 2 라운드'를 경험했던 셈이다.아마 그래서 내가 건축학개론을 그렇게 좋아하나 보다.  

영미와 처음 이별한 후 폐인 모드로 두달을 지내고 난 후에

내가 영미와 다시 만난 곳은 내가 속했던 서클의 전시회였다.

대학 4년간 내가 열심히 참여했던 교내 서클은 작품을 제작해서 매년 한번씩 전시회를 여는 곳이었는데,

내가 다녔던 대학의 가을 축제 때 열린 작품전시회에 영미가 나타났던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다시 한 번 영미와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갖고 있었다.

그건 아마 나와 같은 서클에 영미의 여고 시절 베프였던 진선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와 영미 사이에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연결 방법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우리의 재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진선이였다.

 

진선이로부터 어떤 암시 같은 것이 있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별다른 근거도 없으면서 그 전시회에 영미가 꼭 올 것 같은 예감이 아주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나는 수업도 빼먹어 가며 열심히 전시회장을 지켰다.

그리고 그런 예감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영미가 진선이의 손에 이끌려 전시회장에 나타났던 것이다.


두 달만에 영미가 내 눈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놀랍고 흥분되기는 처음 미팅에서 그녀가 내 파트너가 되었을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나는 서두르거나 오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넸고영미는 조금 쑥스러워 하면서도 잘 지냈느냐고 나에게 호의적으로 답해주었던 기억이 난다.내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영미는 별다른 거부없이 선선히 동의해 주었고,

그것이 처음 이별할 때의 그 징글징글함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담백했던 우리의 싱거운 재회였다. 

 

영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행복감에 푹 빠진 채로 전시회를 끝내고 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영미네 집에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영미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길래 이름을 댔더니 나를 기억하시면서

"요새는 왜 안 놀러와? 기회 닿으면 다시 한번 우리 집에 놀러오게."라고 친절히 말씀해주셨던 기억도 난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분들 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면

나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영미의 부모님들께는 지금까지도 죄송한 마음 뿐이다. 

그 전화로 영미와 주말에 레몬에서 다시 만나기로 정말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영미가 나를 다시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 여린 스무살 소녀가 나 때문에 그런 용기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헤어지자고 말했던 상대를 스스로 다시 찾아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스러웠을 거고,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마 그래서 우리 서클의 전시회라는 계기와 진선이라는 중재자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건축학개론에서 첫 눈 오는 날 서연이 빈 집으로 승민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에게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도

아마 25년전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와 주던 모습이 연상되어 그랬던 것 같다.

 

그녀가 그런 용기를 내어 나를 다시 찾아와 주었기 때문에, 

영미도 나 못지않게 우리의 첫사랑을 소중히 여겼다고 내가 오늘날까지도 확신할 수 있는 거다.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 당시에 내가 영미의 그런 고운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첫사랑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른다. 

그 가치를 깨닫는 때는 언제나 '현재' 뿐이다.

 

레몬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영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에 다소 위축된 인상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지난 여름의 첫번째 이별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별하던 과정이 너무 쓰라려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내 입에서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영미만큼이나 우리 첫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고

괜한 감정 싸움을 일으켜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영미에게 두 달 사이에 뭔가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물었을 뿐이었다.

영미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아버님 병환도, 고시 준비하겠다는 계획도....

'그럼 왜 나에게 다시 찾아온거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겁이 났기 때문에,

마치 두 달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벼운 농담이나 건네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 주말에 함께 영화구경을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우리의 첫사랑은 (적어도 겉으로는) 그걸로 완벽하게 복원된 셈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차라리 내 마음 속에 있던 감정을 침착하게 이야기하고 풀어버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우리의 재회가 쿨하지도 않았을 거고 멋지지도 않았겠지만,

스스로 돌아온 마당에 영미도 어느 정도까지는 내 불평을 들어줬을 테고,

나도 가슴 속에 원망을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폭발시키는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도 않았을텐데...

나는 쿨해야 했던 첫번째 이별에서는 너무나 신파적이었고,

조금은 까칠했어도 좋았을 재회 과정에서는 너무도 쿨한 척 했던 거다. 

실제로는 별로 쿨하지도 못했던 주제에 말이다. 

 

영미와의 재회에서 당황스러웠던 일은 다시 만난 그녀가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밝고 예쁘고 고운 인상이었지만, 

머리 모양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그새 파마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면 지난 여름의 그 지겨웠던 이별 과정이 영미를 바라보는 내 시각을 바꾸어 버린건지

나는 뭔가 그녀가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헤어졌던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실망한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편이다.

두 달만에 만났어도 그렇게 느낌이 달랐는데, 

몇년만에 다시 만나 예전의 그 느낌이 살아날 리가 없는 거다.

 

그래도 다시 만난 우리는 나름 행복했다. 

나는 영미의 진심을 알게 되어 다시 그녀와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뻤고,

바라던대로 무난히 첫사랑을 복원시킬 수 있어서 그랬는지 

영미 또한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학기 때처럼 자주는 아니었지만 시간날 때마다 함께 만나서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흠뻑 즐겼다. 

우리는 화창한 봄날에 어울리던 풋풋한 새내기 커플에서

아름다운 가을날에 잘 어울리는 연인들로 업그레이드 됐던 거다.

재수강 강의록에서 언급했던 '작은 신의 아이들'이란 영화를 함께 봤던 것도 그 무렵이었고,

진선이가 서클룸에서 나에게 "영미가 너 다시 만나고서 정말 좋아하더라"는 언질을 줬던 것도 그 때였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그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우리 첫사랑도 한번의 이별과 재회를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졌을 거다.

서로의 마음도 확인했고 외적인 여러 요건도 우리들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우리 앞에는 첫사랑이 활짝 피어날 아름다운 나날들만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만 제대로 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됐을 거다. 나만 잘못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겉보기에 완벽하게 복원된 것처럼 보였던 우리의 첫사랑이 붕괴되어 버린 때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치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이 활짝 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무너져 버린 것처럼.

 

 

건축학개론의 그 강남선배와 비슷하게, 

진선이는 우리의 재회에서도 두번째 이별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재회할 때 진선이가 했던 결정적인 역할은 앞서 언급한 그대로이고, 

나와 영미가 화해한지 몇주 후에, 

영미가 여고 동창생 친구들 모임에서 

"내(영미 자신을 지칭함)가 부르면 그 애(나를 가리킴)는 언제든지 달려나온다"라고 자랑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나에게 이야기해 줌으로써 

본의 아니게 나와 영미가 헤어지는 계기를 촉발해 버린 사람도 진선이였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진선이 탓이라고 말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진선이는 항상 나와 영미의 좋은 친구였고, 

우리가 잘 되도록 여러모로 마음을 써 주었던 착한 아이였다.

진선이가 전했던 영미의 발언도 아무런 악의없이 단순히 

'영미가 너를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이야기 하는 도중에

부연 설명으로 어쩌다가 따라나온 것이었을 뿐이다.

 

영미와 내가 결정적으로 또 다시 이별하게 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진선이의 이야기, 

그저 영미가 연락하면 내가 신나서 만나러 나간다고 자랑했다는 그 이야기를,

그때까지도 첫번째 이별 과정에서 입었던 자존심의 상처를 꽁하게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속좁은 내가

그만 옹졸하게도 영미가 나를 가볍게 여기며 우스개거리로 만들고 있다고 곡해하면서,

첫번째 이별 이래로 쌓여있던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버리고 말았던 거다.

 

나는 분기탱천해서 그날로 당장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고

잔뜩 화난 목소리로 '진지하게 할 말이 있으니 주말에 만나자'고 요구했다.

영미는 내 말투에서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는지,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라면서 명랑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는 잔뜩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다.

 

영미와 이별하던 그 마지막 날, 우리는 원점으로 회귀하듯이 레몬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전화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애써 평소와 다름없이 명랑한 것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잔뜩 골이 나있는 무시무시한 내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 표정은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에게 '꺼져줄래?'라고 말하던 승민과 

아마 굉장히 비슷했을 거다.

나는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옹졸하게도 지난 여름부터 영미에게 쌓여온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켰고,

'부르면 언제나 뛰어나온다'는 식으로 나를 우습게 여기는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며,

남자를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는 여자와는 더 이상 만날 생각이 없다고까지 잔인하게 말해버렸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날의 영미는 그전까지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수그리고 있는 가녀리고 연약한 소녀였다.

화가 치밀어 올라 되는대로 지껄이던 나에게조차 연민의 감정이 갑자기 솟구쳐 오를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궁금했는지 

걱정하는 표정에서부터 시작했던 그녀의 모습은

내 말을 들으면서 당황하는 표정과 놀라는 표정을 거쳐

끝내는 슬픔에 잠겨 아파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놀랍게도 그 표정의 변화는 25년 뒤에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에게 모진 이별선고를 받을 때 서연의 표정 변화와 똑 같았다.

꺼져줄래? 장면에서 스크린에 투영되던 수지의 표정이 나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거다. 

 

영미는 내가 따져묻는 말들에 대해서 고개만 수그린 채로 끝까지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철없고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나의 오기를 더 자극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의 나는 영미가 

그건 아니라고, 그건 나의 오해라고, 그녀의 진심은 그렇지 않다 라고 

해명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그렇지만 영미는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까지 끝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나를 서글프게 한다.

 

영화 속에서 승민이 서연에게 자신이 화난 원인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해명을 요구했더라도

아마 해피 엔딩은 아니었을 거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경험 탓일 거다.

 

.....그토록 착하고 고왔던 여자아이에게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잔인했던 걸까?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죄책감을 느낄만큼 영미에게 미안하고

벽에다 머리를 박아서라도 속죄하고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은 차라리 불가항력적인 오해였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지만,

나는 변명할 여지조차 없이 오직 나 자신의 옹졸함과 편협함 때문에

첫사랑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인생에 단 한번 뿐인 귀한 첫사랑을 내 스스로 부숴버린 것이다.

영미가 그토록 큰 용기를 내어 나를 다시 찾아오며 어렵게 그녀의 진심을 내게 보여줬는데도.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함께 레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치르기 위해 카운터로 갔을 때, 

주인 아주머니가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번갈아가며 우리를 쳐다보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워낙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인지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 사이를 알고 계셨던 모양인데,

레몬이 워낙 조그만 카페여서 그날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를 다 들렸을 거다.

계산을 해주시면서도 "그렇게 예쁘게 잘 사귀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래?"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영미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이별하던 그날은 하필이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 서글픈 분위기를 더했는데,

비 때문에 옷이 젖어 각진 어깨심이 비춰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도대체 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나 기억에 선명한 것인지 모르겠다.

건축학개론을 처음 봤던 날도 그날처럼 처량하게 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서글펐던 이별의 기억을 더욱 강하게 증폭시켰던 것 같다.

 

레몬이 있던 이대앞을 기준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2호선 지하철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열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의 행선지가 갈라지는 환승역인 을지로 3가 역이 가까와져서 다음에 내리겠다고 내가 말했을 때,

당황해 하며 뭔가 말하려던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번도 을지로 3가에서 헤어졌던 적이 없었다. 

아무리 못 가더라도 한양대 역까지는 꼭 내가 영미를 바래다 주었던 것이다.이제는 그녀를 바래다 주지 않겠다는, 예전과 다른 내 행동의

 의미를 영미도 알았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바래다 주는 연인 사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녀가 을지로 3가 역에서 내게 하려다 말았던 마지막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영미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그녀를 찾아갈 수 있었을까?이제 와서 그런 생각해 봤자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첫사랑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지하철 안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던 처연한 모습이다.

열차가 움직임에 따라 영미의 모습이 서서히 안 보이게 되고

그녀가 타고 있던 지하철이 터널 안으로 쉐엑- 소리를 내며 갑자기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는 지금과 달리 서울 지하철에 안전벽이 없어서

기차가 지하 터널로 사라지는 모습을 플랫폼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슴 한구석에 쿵- 하는 충격을 느끼며 이제 다시는 영미를 보지 못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첫번째 이별했을 때는 어쩐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남아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에는 진짜 영영 이별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30년 동안 다시는 영미를 만나거나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것이 내 뼈아픈 첫사랑의 마지막이었다.

 

때때로 우리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딱 거기까지였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우리 사이가 온갖 인연으로 연결되는 듯이 보였던데 반해서

두번째 이별 이후에는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온갖 연결고리들이 모두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진선이는 1학년 내내 전공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을 하더니

대학을 다니면서 한편으로 재수 준비를 병행해서 학력고사를 치르더니

그 다음 해인 88년에 원하는 전공으로 다른 대학에 입학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내가 참여하던 교내 서클은 탈퇴했고 

더 이상 나와 영미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도 해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레몬 또한 장사가 잘 안되었는지 몇달 후에 없어져서 

우리의 이별에 때맞춰 끊어져 버린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둘이 함께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을 다시 관람하고 싶어져서

영미와 헤어진 후에 나는 

두 번이나 

혼자 영화관에 갔었다. 

어두운 영화관에 홀로 앉아 영미를 많이 닮은 여주인공 말리 매틀린을 볼 때면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감정이 마구 솟구쳐 올라 주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집이 어디인지도 알고 전화번호도 외우고 있었으니, 

영미가 나를 다시 찾아와 주었듯이 내가 먼저 사과하고 그녀를 찾아갔더라면 

혹시 첫사랑을 복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첫번째 이별할 때 그녀에게 받았던 냉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잔인하게 먼저 이별을 고했던 주제에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첫번째 이별 후에 영미가 나를 다시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었는지,

그러니까 영미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고 우리 첫사랑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나는 여자인 영미만큼도 용기가 없었던 걸까. T_T

 

그래서 나는, 빈 집에 서연이 놓고간 CD를 승민이 발견하고 그녀의 마음도 알았을 때  

왜 다시 서연을 찾아가지 않았으냐는 어떤 사람들의 질문은 그다지 의문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다. 

승민도 그저 나처럼 용기가 없었던 거다.

영화 속에서 서연이 내뱉은 대사처럼, 나도 승민도 병신이고 개새끼였던 거다.

첫사랑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누릴 자격과 용기가 없는 못난 놈들이었단 말이다.

 

영미와 헤어진 것은 11월말 경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1987년의 그 잊지 못할 대통령 선거와 사회적 격변이 있었고,

평생 한번 뿐인 뼈저린 첫사랑과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한 정치적 혼란을 한꺼번에 경험한 탓인지

지칠대로 지쳐 겨울방학 두달을 내내 동면모드로 허송세월 하고 나서

다음해 봄에 심신을 추스리고 다시 개강을 맞이했을 때, 

이미 나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영미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은 꽁꽁 봉인되어 잠재의식  한구석 에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었다.

25년 후에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갑자기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의식의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당시에는 몰랐던, 내 삶에서 첫사랑이 갖는 의미를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